[아이] 사랑의 형태

사랑의 형태

 
1.    새로운 시작.
 
여느 때와 같은 평화로운 일상. 평일 동안 조금 밀린 집안일을 하고 있던 유이는 즐겁게 뛰어다니는 네티와 코코를 보며 작게 웃음지었다. 네티와 코코는 몬스터볼 안에서 쉬는 것보다 유이와 함께 지내는 걸 선호했는데, 최근 들어 살짝 문제가 있다면….
 
“삐!”
“피!”
“응? 네티, 코코~ 무슨 일이야?”
 
네이티오가 된 네티와 파비코리인 코코가 어릴 때보다 많이 컸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게 문제가 되진 않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느새 사람만큼 커버린 아이들과 유이와 슈리까지 넷이서 함께 지내기엔 집이 너무 좁은 상태였다. 유이는 집구석에 들어가 버린 공을 꺼내려다가 작은 통로에 사이좋게 몸이 끼어버린 네티와 코코를 보며 실소를 지었다. 둘 다 저 공만 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둘 다 자기와 비슷한 눈높이가 된 건지 시간이 체감되기도 했다.
 
“공 꺼내려고 하다가 둘이 끼어버린 거야?”
“삐.”
“피~”
 
아이들의 대답에 유이는 푸스스 웃으며 둘을 조심스레 꺼내주었다. 둘이 딱 붙어 이리저리 눌려 숨이 죽은 털들을 다시 빗겨주고, 공을 꺼낸 유이는 잠시 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네티와 코코를 바라봤다.
 
“그런데… 네티가 사이코키네시스로 공을 가져왔으면 됐을 거 같은데~”
“……삐…!”
“피~”
 
그 말에 충격을 먹은 표정으로 “몰랐어.”라고 대답하는 듯한 네티와 “그렇네, 바보~”하는 표정으로 네티를 바라보는 코코를 보며 유이는 참지 못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센터 2층에 있는 집은 처음엔 유이와 슈리 그리고 슈리의 파트너인 큐와 쿠 넷뿐이었는데, 큐와 쿠는 몬스터볼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기에 사실상 둘이서 지내는 집과 다름이 없었다. 네티와 코코가 진화하기 전까지도 아이들이 작아 집이 좁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는데, 확실히 이제는 더 넓은 집이 필요하다는 걸 체감하는 유이였다.
 
“역시… 이사를 하는 게 좋겠지? 엄마는 사실 다 같이 옹기종기 지내는 것도 좋은데~ 네티랑 코코 놀이방도 있으면 더 좋을 거 같고, 쉬는 방도 따로 있으면 좋겠고 말이야.”
“삐이~”
“피~”
 
그 말에 대답하며 옹기종기 안겨 오는 네티와 코코를 품에 끌어안은 유이는 좀 더 큰 집으로 이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동시에 든 생각은…….
 
2.    단어 하나에 형태를 담지 않고.
 
“그래서 말이야, 렌이랑 동거하면 어떨까?”
“응……?”
 
카페에 마주 보고 앉아 유이가 먹고 싶다고 했던 브라우니를 자르던 렌은 동거라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내가…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동거? 오해할까 봐 알려주자면 렌은 동거라는 말을 듣자마자 기쁜 감정이 앞섰다. 당장도 유이네 센터와 집 비밀번호도 알고 있고, 비상용 열쇠까지 선물 받았으니 이 정도로 깊게 쌓인 신뢰와 애정에 함께하는 동거를 생각하는 건 정말로 설레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설렘과 기쁨을 잠깐 뒤로하고 심란함이 앞서는 이유는…. 제 애인의 나이가 자신보다 3살 어린 22살이라는 점이었다.
 
“슈리 쌤한테 허락은 받았어?”
“동거하면 가을이랑 라떼도 매일 볼 수 있고~ 렌이랑도 매일매일, 어? 슈리 허락… 받아야 하는 거였어?”
“부모님이니까…?”
“아~ 렌도… 허락받아 와?!”
“응? 응. 당연하지~”
 
동거라는 주제에 마음이 앞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유이를 보며 렌은 못 말린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브라우니 한 조각을 유이에게 먹이며 렌은 생각했다. 당연히 엄마는 허락해 주실 테고, 리쿠 쌤도 유이가 원한다고 하면 허락을 안 해주진 않으시겠지. 하지만 왜인지 리쿠 쌤에게 불려 가서 면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으니까, 유이가 허락을 받아오면 괜찮겠지?
 
“오늘 집에 가면, 바로 허락 받아올게! 신난다~ 역시 조금 큰 집이 좋겠지? 애들 쉬는 놀이방도 있으면 좋을 거 같고, 렌 직장이랑도 가까우면 좋겠어!”
“가을이랑 라떼가 풀장도 좋아하는데 새로 알아봐야겠네. 아, 나는 차 있으니까 이왕이면 유이 센터랑 가까운 곳이 좋을 거 같아.”
“헤헤, 앞으로 집도 알아보고 이사도 하려면 바쁘겠다.”
“그래도 둘이서 하면 괜찮을 거야. 나도 쉬는 날에 열심히 알아볼게.”
“응, 좋아!”
 
아직 보호자에게 허락도 받지 않았지만, 유이는 꽤 신난 것처럼 보였다. 벌써부터 포켓몬 용품을 고르며 뭐가 더 좋을까? 하고 두 눈을 빛내고 있으니 말이다. 렌은 그 모습에 따라 무엇으로 집을 채울지 한참을 앉아 이야기하며 장바구니를 채웠다. 갑작스러운 제안이긴 했지만, 동거라는 건 서로를 믿는다는 증거였고 미래를 함께하고 싶다는 다짐과 다름이 없었으니. 렌은 유이의 제안이 기쁘면 기뻤지, 절대 곤란하다든가 싫은 건 아니었다. 물론 너무 어린 유이를 볼 때마다 자신이 파렴치한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이건 그저 렌 혼자의 고민이자, 양심일 뿐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아들, 왔어? 유이랑 데이트?”
“응. 저녁도 먹고, 카페도 다녀왔지~”
“재밌었겠네~”
 
렌의 어머니 아마네 리에코, 그녀는 아들에게 처음 생긴 여자 친구를 진심으로 예뻐하고 있었다. 많은 이유가 있을 필요도 없이 리에코에게 유이는 너무나 작고, 친절했고 무엇보다 애교가 많은 딸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렌이 언제 이렇게 커서 이어롭을 닮은 아이를 만나게 된 건지, 리에코는 그동안의 시간을 체감하기도 했다. 예쁘장하고 귀엽게 생긴 유이를 떠올리며 미소를 짓는 리에코 앞에 앉은 렌은 따라 방긋 웃으며 시선을 맞췄다.
 
“엄마. 나, 유이랑 동거할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어머, 렌이랑 유이 의견이 중요하지. 이렇게 말하는 거 보면 렌은 어느 정도 결심한 것 같고… 유이는 어떻대?”
“유이가 먼저 물어봐 줬어. 최근에 네티가 진화해서 지금 집은 지내기에 좁다고 하더라고. 큰 집으로 이사 가는 김에 동거하고 싶다고 물어보길래~”
“유이랑 렌, 둘이 좋으면 엄마도 너무 좋지. 잘됐다. 언제나 둘의 의견이 중요한 거 알지? 물론 렌이 잘 챙겨주고, 서로 배려하는 것도 잊지 말고. 엄마는 언제나 렌을 믿어.”
 
잠시 눈을 감은 채 식탁 위에 올려진 렌의 손등을 토닥이는 리에코는 렌이 유이를 만나기 시작할 때부터, 몇 번이고 비슷한 이야기를 전했다. 저 이야기의 시작은 아버지 때문이겠지. 렌은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와 자신 곁에 없는 아버지의 존재에 의문을 가졌었다. 자연스러워서 빈자리를 느끼지 못했고 또 동시에 크다 보니 자연스레 느끼게 된 부재였다. 어린 렌이 이 의문을 물었을 때, 리에코는 낮은 시선을 맞추며 이야기했다.
 
“렌,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있어. 단순하게 엄마 아빠에서 그치지 않고, 그 존재가 사람이 아닌 포켓몬이 될 수도 있지. 비록… 아빠는 사정이 있어서 우리 곁에 없지만 이건 렌의 잘못도 아니고, 아빠가 렌을 미워하는 것도 아니야.”
“으응….”
“무엇보다 엄마는 세상에서 렌을 제~일 사랑해.”
“……! 나도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정말~? 기뻐. 렌이랑 엄마랑 같은 마음이네! 아들, 살다 보면 사랑하는 존재들이 늘어날 거야. 그 마음을 소중히 하고 있는 힘껏 사랑하며, 아껴줘. 진실된 마음은 언제나 남아있는 법이니까.”
 
리에코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작은 몸을 품에 끌어안아 등을 토닥였다. 리에코가 있는 힘껏 사랑하고 아낀, 진실한 마음의 증거는 아마네 렌이었으니까. 렌은 어릴 때는 어려워서 이해하지 못했던 말을 바르게 자라며 이해할 수 있었고, 딱 한 번. 궁금하여 찾아본 아버지의 소식은 딱히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아 그대로 노트북을 덮었다. 착잡하다든가 달갑잖다든가 하는 마음보다도 리에코가 먼저 떠올랐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배우고, 사랑받았으니까. 아마네 렌은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탓하는 것보다 애정하는 이를 있는 힘껏 사랑하고, 아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엄마 고마워.”
“응?”
“엄마 덕분에 나, 사랑하는 존재가 많아졌어.”
“벌써 훌쩍 커서 여자 친구랑 동거하겠다는 것도 대견한데, 렌이 이렇게 올바르게 커 줘서 엄마야말로 고맙지.”
 
리에코는 이제 자신보다 커진 렌의 손을 잡았다. 사랑했기에 사랑을 알려줄 수 있었고, 네가 사랑하기에 나도 사랑할 수 있었어. 렌, 너는 단순하게 사랑의 결실이기만 한 게 아니란다. 네가 내 세상을 넓혀준 거야. 사랑하는 아이야 멈추지 말고 나아가렴, 네가 나아가는 모든 길을 지켜볼 테니. 눈이 닿는 모든 이들에게 마음을 전해주길 바란다.
 
3.    만들어가는 것들에 이름을 붙이며.
 
→ [렌~ 오늘 춥대, 따뜻하게 입고 나가! 가을이랑 라떼한테도 안부 전해줘. 셋 다 보고 싶어🤎] 오전 6:58
→ [나 슈리한테 렌이랑 동거하겠다고 말했어. 슈리가 괜찮대! 그런데 렌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하더라~ 주말에 놀러 올래?] 오전 7:00
← [동영상] 오전 7:21
← [오늘 정말 춥다. 유이도 감기 걸리지 않게 따뜻하게 입어. 안부 전해줬더니 둘이 신나서 뛰어다니는 중ㅎㅎ 나도 보고 싶어💚] 오전 7:22
← [정말? 잘됐다. 초대해 주면 나야 언제든 고맙지. 유이랑 리쿠 쌤 편한 시간에 갈게.] 오전 7:24
 
평소와 같은 기상과 출근 그리고 업무. 다행히도 오늘은 별다른 사건이 있지도 않고, 경찰서 내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한가한 하루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생각은 더 많아지는 법. 렌은 아직까지 유이와의 동거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너무 좋고, 서로의 보호자들에게 허락도 받았지만… 아, 리쿠 쌤이 보자는 건 너무 무서워.
 
“올 게 왔구나… 하지만, 걱정하시는 것도 당연하니까.”
“어이~ 뭐라고 중얼중얼하는 거야? 주말 지나고 출근하니까, 얼굴에 근심이 깊어.”
“카케루. 커피 고마워.”
 
동갑이자 입사 동기인 카케루가 렌의 책상 위로 커피를 올려놓으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바로 옆자리이기도 한 카케루는 의자에 앉아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기다리는 듯 렌을 빤히 바라봤다.
 
“그래서,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거야?”
“음…….”
“뭐야? 궁금하게 굴지 말고 당장 말해!”
“흠…. 나 주말에 유이 만났는데, 유이가 이사하는 김에 동거하고 싶다고 얘기하더라고.”
“잠깐… 주말에 여자 친구 만나서 데이트한 것도 부러워 죽겠는데, 동거하자고 했다고? 유이가? 완전 배 아파. 아, 진짜 배 아파.”
“아니, 고민이라니까? 좀… 파렴치한 같잖아. 유이 너무 어려.”
“무슨 소리야 대체? 아, 배 아파. 부러운 새끼.”
“하… 진짜 도움 안 돼.”
 
부러움에 몸부림치는 카케루를 보며 렌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혼자서 시끄럽게 굴던 카케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동료인 후와의 등장에 그나마 조용해졌다. 물론 작은 폭력이 있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평화로워졌으니 된 거 아닐까? 렌은 투닥거리는 카케루와 후와를 보며 흩어진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유이가 먼저 권해준 거고, 모두 좋다고 하는데 더 땅 파고 있을 필요 없겠지. 오늘 퇴근하면 유이한테 동거하게 돼서 너무 좋다고 얘기하는 거야. 알아볼 집 리스트도 좀 뽑아두고, 같이 봐둔 가구도 정리해 보고. 할 일이 늘어난 게 연말이 체감돼서 좋네.’
 
그렇게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낸 렌이 집으로 돌아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고 있을 때였다. 거실 바닥에 놓인 핸드폰에 옹기종기 모인 가을이와 라떼가 앞발로 열심히 화면을 누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을이랑 라떼. 뭐해?”
“낑….”
“컹!”
“가을이 쉿…. 아, 유이한테서 연락이 와 있었…네…?”
 
왜인지 축 처진 라떼와 재촉하는 듯한 가을이를 진정시킨 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핸드폰을 들었다. 핸드폰에는 렌이 씻는 동안 유이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있었는데, 그 내용을 확인한 렌은 순간 너무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렌 퇴근했어?] 오후 8:03
→ [전화 안 받길래 라인 남겨놔! 렌, 나랑 동거하는 거 너무 부담스러우면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오후 08:11
→ [난 그냥 렌이 우리 집도 자주 놀러 오고, 슈리 없을 때도 자주 자고 가고 가을이랑 라떼도 좋아하고… 최근에 네티까지 진화해서 집도 좁아진 상태라 이사할까 싶은 와중에 렌이랑 같이 살면 매일 보고 너무 좋을 거 같아서 말했는데, 그렇게 고민할 줄 몰랐어 미안해🥺] 오후 8:30
 
“잠… 잠깐. 이거 뭐지?”
“낑…”
“끼잉…”
“아빠 걱정해 주느라 핸드폰 보고 있던 거야? 그런데 이거 무슨… 아, 카케루. 카케루 짓이다….”
 
‘아냐, 이거 아니지….’ 유이가 남긴 연락에 숨이 턱 막힌 렌은 조금 떨리는 손으로 답장을 몇 자 적다가, 이내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당장 렌에게 억겁으로 느껴지는 통화음이 지나고, 그 소리가 끊긴 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렌은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숨 쉴 틈도 없이 말을 꺼냈다.
 
“렌~ 집에 잘 들어갔,”
“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진짜 오해야. 전부 오해야! 동거하자고 말해준 거 너무 기쁘고 좋았어. 근데 난 유이가 어려서 슈리쌤이 걱정하실까 봐 그게…! 그게!!! 우려됐던 거지 나는 정말 그거 말고는 하나도 고민하지 않았어. 심지어 우리 어머니조차도 엄청나게 좋아하셨거든, 나도 가을이 라떼랑 네티랑 코코랑 새로운 집에서 살면 너무 좋을 거 같다고 생각했어! 정말 오해야…!”
 
렌의 구구절절한 말이 끝나자, 아주 잠시 정적이 일어났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렌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려던 그때, 핸드폰 너머로 매우 밝은 유이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아하하, 그게 걱정됐구나~ 렌 말 엄청 빨랐어! 그런데 어머니도 좋다고 해주셨어? 난 또, 아까 카케루랑 연락했는데 렌이 나랑 동거하는 거 엄청 고민하고 있다고 하길래 걱정돼서~ 그만 연락 남기고 말았네.”
“역시 카케루가 말했구나 의견을 좀 물어봤을 뿐인데…. 응, 엄청 좋아하셨어~ 필요한 가구도 같이 봐주시겠다고 했고.”
“정말~? 너무 기대된다!”
 
그날 렌과 유이는 앞으로 함께할 미래를 그리며 한참 동안 통화를 했다. 행복한 미래에 사랑하는 이가 있을 거라고 다짐하는 것, 서로가 서로의 미래에 함께할 거라고 확신하는 마음. 이 올바르고 강한 마음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또 다르게 생각하면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빈 도화지에 희망을 그리는 일은 갈 길이 먼 꿈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니까. 그저 우리가 바라는 대로 나아가면 되는 거야. 서로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 바로 시작이니까.
 
4.    근사한 일을 기다리고 있어.
 
“카케루 너무해~ 내가 몇 번이나 물어봤는데, 렌이 동거하는 거 엄청엄청 고민하고 있다고 부담스러워하는 거 아니냐고 했었잖아!”
“아파, 아파…! 친구야 이거 놓고 말하자 제발.”
“카케루 컨디션이 아주 강인함인데? 얼른 해명 좀 해줘.”
“그래! 사실 너무 부러웠어!!! 겸사겸사 유이가 너무 잘 속아서 놀리고 싶었어!”
“으이긍, 렌이 얼마나 놀랐겠어. 다음에 또 이러면 카케루 연락 안 받을 거야.”
“아, 안돼. 유이 님 한 번만 자비를….”
 
영상통화 화면을 향해 손을 싹싹 비는 카케루 행동에 모두가 웃음을 지었다. 작은 소동이 있었지만 오해도 풀렸고, 모든 일의 결론도 좋게 내려졌으니 렌은 연말 마무리와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그 준비가 모두 쉽고 순탄한 건 아니었지만 렌에게 있어서 가장 긴장되는 일은 슈리와의 만남이었다.
 
“그래서. 유이랑 동거할 집을 알아보고 있다고?”
“네? 네…!”
“결혼 생각은 있고? 솔직히 애까지는 너무 이른 것 같은데.”
“결혼은 허락만 해주신다면…! 그, 그거까진…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요….”
“계획은 딱히 안 세운 건가….”
“슈리! 얼굴 보고 싶다길래 불렀더니, 왜 렌 괴롭히고 있어?!”
 
왜인지 무릎 꿇어야 할 것 같은 느낌…. 슈리 쌤 볼 때마다 심문을 당하는 기분… 기분 탓이겠지…? 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슈리는 그저 커피를 마시며 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식이라도 좀 가지고 오겠다며 부엌으로 사라졌던 유이가 나타나며 다행히 슈리는 질문을 멈췄지만, 여전히 시선은 렌을 향하고 있었다.
 
“슈리는 너무 걱정이 많다니까. 렌이 얼마나 믿음직스럽고, 철저한데~”
 
그리고 이어지는 유이의 말에 두 남자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슈리가 걱정이 많고, 렌이 든든한 것도 맞지만 둘에게 유이는 너무 순진하고 해맑은 딸이자 애인이었다. 커피를 내려놓은 슈리가 “……내가 왜 걱정하는지 알겠나?”라고 물었고 렌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고개를 끄덕이는 채 “네. 저 같아도 걱정했을 거 같아요.”하고 대답했다. 물론 이 남자들의 걱정을 알 리 없는 유이는 왜 둘이서만 의견이 통합된 거냐며, 이러기 있냐고 장난스레 둘을 째려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멋쩍게 웃는 렌과 시선을 피하는 슈리의 얼굴이었다.
 
“사실 둘이 좋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지. 준비하다 필요하거나 부족한 거 있으면 찾아오고, 이건 준비하면서 편하게 써.”
 
슈리는 미세하게 웃음을 지으며 카드를 건네줬다. 집을 새로 구한다고 하니 마음 같아선 직접, 이래저래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매일 센터에 있어야 하는 건 물론이고 연말이라고 온갖 곳에서 종류를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일에 시간을 내기 어려웠던 슈리 나름의 표현이었다.
 
렌과 이야기를 나누며 환하게 웃는 유이의 얼굴을 바라본 슈리는 이번엔 그때의 시작을 되새기지 않았다. 이건 너에게 있어 또 새로운 시작일 테니까, 앞으로 이어질 웃음과 행복을 곱씹어야지. 네 따뜻한 마음은 역시 모든 생명에게 봄을 가져다주는구나. 유이 높게 날아가, 네 날갯짓에 일어난 순풍은 모두에게 굉장한 효과를 불러일으킬 테니까. 너의 모든 앞날에 행복이 가득하길 바란다.
 
둘의 이사 겸 동거 준비는 착실하고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좋은 집을 구한 건 물론이고, 되도록 내년이 되기 전에 이사하고 싶다는 유이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여 이사 날짜도 빠르게 잡았으니 이제 남은 건 빈집을 채울 가구들이었다. 포켓몬 용품이나 가구면 몰라도 사람이 사용하는 것에 대해 큰 지식이 없었던 유이는 수많은 브랜드와 종류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가구나 살림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는 리에코는 전에 말했던 대로, 흔쾌히 함께 가구 쇼핑에 나섰다. 둘보다 더욱 신나 가성비 좋은 가구들을 고르던 리에코는 “이게 정말 좋아 보이는데… 예산에서 너무 많이 벗어날까?”하는 걱정을 보였지만 유이는 활짝 웃음 지으며 “슈리가 센터를 비울 수 없어서 함께 못 오는 게 아쉽다고, 예산 신경 쓰지 말고 고르라고 했어요!”라며 전에 받았던 카드를 꺼내 보였다. 그 말에 따라 환히 웃은 리에코는 사양하지 않고 아이들이 쓰기 제일 좋은 가구들을 고르며 여러 살림에 대한 정보와 팁을 아낌없이 전해주었다.
 
“큰 가구들은 모두 골랐고, 자잘한 건 둘이서 살 수 있지?”
“응. 대부분 주문해서 날짜 안에 도착하면 될 것 같아. 연말이라고 너무 늦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바쁘실 텐데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저어, 혹시… 근처에 식당 예약해 놓았는데 엄마, 합……. 어머님만 괜찮으시다면 저녁 먹고 가실래요?”
“어머. 일하면서 이사 준비하느라 바빴을 텐데, 언제 예약까지 해놨어~ 우리 딸, 너무 기특하네. 유이가 같이 저녁 먹자고 하면 엄마야 너무 좋지.”
 
당연한 얘기지만 유이는 22년을 살아오는 내내 누군가를 엄마나 아빠라고 부를 일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슈리를 그렇게 부를 수도 있었지만 둘은 그런 호칭이나 역할에 구애받지 않고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입 밖으로 꺼낼 일이 없는 단어들이었다. 이러한 점이 결핍이 되거나 외로움으로 남진 않았지만, 렌이 따뜻하게 웃으며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면 그 따스함이 자신의 마음까지 닿는다고 느끼는 유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본능적으로 나온 호칭에 스스로도 깜짝 놀라 손으로 입을 막았고, 혹시라도 실례가 아닐까 걱정했으나 리에코는 오히려 유이의 그 마음을 따스하게 받아들였다.
 
“헤헤, 슈리가 맛집이라고 추천해 줬어요! 얼른 가요.”
 
리에코에게 자연스레 팔짱을 낀 유이는 느릿한 발걸음을 옮기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렌은 둘보다 훨씬 걸음이 빠름에도 한 발짝 떨어져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리에코와 유이가 걸어간 길을 따라갔다. 그리고 동시에 어릴 때 들었던 리에코의 말을 떠올렸다. 세상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있다는 그날의 말을, 동시에 그날의 온기를 아마네 렌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 형태를 담을 필요는 없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삶에 이름을 붙이자니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되어 있었다. 이건 어쩌면 렌이 너무나도 기다렸던 것이고, 기대했던 모습이고… 더욱 확실한 건 너무나도 눈부신 근사한 일이니까.
 
“렌~ 빨리 와!”
“아들, 피곤한 거 아니지?”
“아니야. 그냥 이렇게 있으니까 너무 좋아서~”
 
익숙하고 잊을 수 없는 얼굴들을 보며 렌은 따스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두 사람을 향해 조금 벌어진 거리를 성큼 걸어갔다. 앞으로도 행복한 일만 있을 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 그래도 분명 괜찮을 거야. 걱정보다 더 많이 사랑할게, 함께라면 어떤 일이라도 이겨낼 수 있을 거니까. 자, 이제 시작이야. 함께 행복한 미래로 나아가 줘.
 
5.    모두의 희망사항.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사는 준비한 것에 비해 생각보다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올해의 마무리와 동시에 새로운 집에서의 동거를 시작한 렌과 유이는 함께 맞이하는 새해를 위해 1월 1일이 된 오늘, 하츠모데를 참여하러 큰 신사를 방문했다.
 
“기도는 다 했으니까, 오미쿠지 뽑으러 가자! 그런데 가을이랑 코코는 어디 갔지?”
“올해 오미쿠지는 어떨지 기대되네~ 아, 저기 당고도 팔던데 유이 배고프다고 했지? 간식도 사 가자. 가을이랑 코코는 분명… 아까까지 여기 있었는데?”
“삐.”
“멍!”
 
두리번거리는 렌과 유이를 힐끔 바라본 네티는 한쪽 날개를 들어 당고 가게를 가리켰다. 가을이도 눈알을 굴려 그 가게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고 가게 앞에 헥헥거리며 서 있는 가을이와 그런 가을이 위에 편안히 앉아 있는 코코는 행복하다는 표정으로 무언가 열심히 우물거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놀란 렌은 허겁지겁 둘을 향해 달려갔다.
 
“가을이, 코코! 뭐, 뭐 먹는 거야?”
“피~”
“컹!”
 
다행히도 둘이 먹고 있던 건 포켓몬용 당고였다. 인심 좋은 가게 주인분이 말하길 신사에 들어올 때부터 이곳을 바라보는 가을이 코코와 눈이 마주쳤는데, 보호자들이 참배하는 사이에 이리 오라고 손짓하니 후다닥 달려오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포켓몬용 당고를 나눠줬다고 한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렌과 유이는 못 말리는 아이들 행동에 크게 웃음을 지었다. 몇 번이나 주인분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하고, 포켓몬용과 선물용 당고 그리고 당장 둘이서 먹을 몫까지 잔뜩 구매하고 나서야 그 가게를 떠날 수 있었다.
 
“렌도 배고프지? 얼른 먹어봐! 어때, 맛있어?”
“으음~ 가을이랑 코코가 왜 가게 앞에서 안 떠났는지 알겠는데. 정말 맛있다.”
 
손이 없는 렌을 대신해 당고를 건네준 유이는 렌의 반응에 두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미소 지은 렌이 얼른 유이도 먹으라고 이야기하자, 유이는 다음 장소로 발을 옮기는 동안 순식간에 당고를 먹고 벌써부터 점심 메뉴를 고민했다. 이렇게 보니까 참, 가을이랑 유이랑 좀 닮은 것 같단 말이야.
 
“자아, 엄마가 대표로 올해 운세가 어떨지 뽑아볼게.”
 
유이가 오미쿠지 막대를 뽑자, 렌과 아이들은 옹기종기 모여 그 모습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막대에 적힌 것과 같은 숫자의 서랍을 열어 올해의 운세가 담긴 종이를 꺼내 들고, 기대와 설렘을 가득 안은 채 종이를 펼쳤다. 왜 새로운 시작은 항상 떨리는 걸까. 이 기대와 설렘은 과연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줄까?
 

[오미쿠지: 4번. 험한 길을 넘으니 넓은 그곳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운세: 대길.
소원: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집니다.
학문: 학업에 집중하면 결과를 성취합니다.
이사: 좋은 시기입니다. 다만 함께할 사람을 신중히 고르세요.
결혼: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됩니다.
출산: 무사합니다.」

 
선행은 언제나 보답받는다. 희망은 항상 절망보다 더 많다. 그렇기에 우리는 미래를 다짐하고, 또 기대하여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거니까. 유이는 언제나처럼 환히 웃으며 곱게 펼친 종이를 들어 렌에게 보여줬다. 혼자였다면 감히 꿈꾸지도 못하고, 겪을 수도 없었던 행복이 모두를 감싸안았다.
 
“대길이야! 이거 봐, 좋은 말들이 잔뜩 적혀있어. 특히 이거, 어쩌면… 아마네 유이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와아~ 올해는 시작이 좋네! 유이가 운세를 잘 뽑아준 덕분이려나. …… 아. 아마네 유이….”
“렌이랑 결혼하면 엄청 행복할 거 같아~”
“응. 정말 매일매일 행복할 거 같아. 아마네 유이… 너무 좋다.”
 
둘은 온기가 느껴지는 손을 마주 잡았다. 밝게 웃는 얼굴이 사랑스러워 서로의 이마를 맞대어 부비기도 했다. 곁에 있는 파트너들이 기분 좋은 목소리를 냈고, 새로운 시작의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반짝이는 눈은 아름다운 갈색빛으로 대지를 닮았고. 단정히 묶인 머리와 끊임없이 닿는 시선은 세상을 가득 채운 자연을, 끝없이 높은 하늘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감히 바라건대 앞으로 너와 내가 살아갈 우주가 축복받길. 그리고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함께 이 아름다운 세상을 지켜볼 수 있길.
 
애정하는 나의 모든 존재들에게, 앞으로 나아갈 매일이 행복을 바라며.
올해도 잘 부탁해.

글쓴이 — 됴
도움, 함께 한 사람 — 첨지
원작, 인용 등 — 포켓몬스터

성나요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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