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유일무이한 초여름

태어남에 예고는 없다. 살아감에 방향 또한 없다. 자라나기 위해선 많은 도움이 필요했다. 한 아이의 시작은 모든 것에 버려진 채, 모순적이게도 세상을 끌어안고 태어남으로부터 시작됐다. 삶의 첫 기억. 맨살에 닿는 부드러운 천, 가벼운 압박감. 그 따뜻하고 포근한 포옹에 흠뻑 젖어 한 번만 더, 다시 한번만 더 그 품이 나에게 돌아오길 바랐다. 과거 식물이 가득했던 큰 정원을 가진 거대한 단독주택. 겉으로 보기엔 아주 평범하고, 행복해 보이는 화목한 부부의 모습. 하지만 그 집의 아래, 차갑고 어두운 곳에 잠들어 있는 건. 아직 피어나지 못한 씨앗 하나. 부화조차 하지 못한 새, 나비 그런 날개를 가진 것들의 알이었다.

 

연구실보다 더 아래 박혀있는 서늘한 지하실은 철저한 보안이 걸려있었으며, 그 안은 차갑고, 어두웠다. 사방을 둘러싼 벽과 천장에는 식물과 자연에 관한 서적, 문서, 보고서 등이 광적으로 붙어있고. 바닥 또한 그런 종이 뭉치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원래 이런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들 입장에선 아주 평범하게 실험을 위한 실험체를 가두는 곳이었으니까. 그 생명체가 동물이 아닌 사람, 그것도 자신들의 혈육이었지만. 그들은 맹목적이었다. 명성, 명예, 권력, 부… 이러한 것들을 온통 손에 쥐고도 어느 순간부터 만족하지 못했다.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고 싶다. 인류의 구원이 되고 싶다. 나아가서, 세상에 칭송받고 우주를 장악할 수 있는 신이 되고 싶다.

 

여자는 두껍고 어려운 서적을 펼쳐 들이밀었다. 아무것도 먹지도, 배우지도 못한 아이는 품이 그리워 그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양팔을 뻗는 일밖에 하지 못했다. 남자는 들고 있는 날카롭고 뾰족한 의료기기를 연약한 살에 삽입했다. 아이가 몸부림치면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고, 여자는 멍과 상처투성이인 두 팔을 강하게 잡아 제압하며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차가운 지하실에서 유일하게 온기가 닿는 순간. 아이는 그 온기에 공포도, 두려움도, 고통도 잊고 얌전히 두 눈을 마주했다.

 

“과학적으로 설명하거나 증명할 수는 없지만… 이 아이의 두뇌와 신체는 평범한 사람의 범주를 넘어섰어. 여태 죽지 않은 것도 신기하군… DNA와 뇌 쪽으로 다시 실험을 시작해야겠어.”

“역시, 역시! 이토록 완벽한 실험체는 본 적이 없어… 계획엔 없었지만, 이것 또한 운명이겠지. 너는 후지모토야. 우리의 피를 타고난 최초의 실험체. 이 아름다운 녹빛 머리카락을 봐. 너로 인해 우리는 신이 되는 거야. 나의 유일무이한 성공체!”

“유일무이라… 마음에 드는군.”

 

남자는 만족스럽다는 듯 보고서 파일을 넘겼다. 실험체의 정보를 적어두는 보고서는 너무 수두룩해서 형식적인 이름이나 번호 따위 붙이지 않는 지 오래였다. 남자는 공백으로 둔 실험체 이름 칸에 천천히 글씨를 적었다. 후지모토 유이(藤本 唯).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세계의 시작이었다.

 

...

 

일상은 평화롭고 단조롭다. 슈리는 오늘도 어김없이 커피를 챙겨 자신의 연구실로 찾아온 렌을 보며 읽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아마네 군. 보통 식물학자들은 대개 바빠진 거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하하, 저녁 아직 안 드셨죠? 슈리쌤만 할까요~ …… 아니, 그래도 아마네 군은 너무해요. 하루이틀 본 사이도 아닌데.”

 

렌의 대답에 슈리는 짧게 웃음을 흘렸다. 커피와 샌드위치로 넘기는 간단한 식사, 동료 이야기, 일상 이야기. 그 끝에 서로의 분야를 파헤치다 보면 슈리는 어김없이 렌의 본론을 끌어냈다. 접점이 없는 분야라도 연구실 바닥은 한없이 좁았다. 식물학자인 아마네 렌과 의사인 리쿠에이 슈리가 연을 이어가게 된 것도 그런 사소한 사유였다. 워낙 사람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 슈리였지만 어리고 착한 렌에겐 한없이 물러지는 경향이 있기도 했다. 렌은 최연소로 연구실에 입성한 천재 과학자라고 불리는 식물학자였다. 뉴스나 신문에도 흔하게 보도되었기에 슈리라고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물론, 그 얼굴은 잊을 수 없는 외모기도 했지만. 이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식물을 되찾는 식물학자들. 하지만 렌은 식물학이 아닌 슈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궁금해하기도 했다. 슈리도 한 분야에만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이 아니니, 그 마음이 이해되기도 했지만. 한 눈치 하는 슈리의 눈에는 렌이 어떠한 일을 위한 정답을 찾고 있다고 느껴졌다.

 

“외과적인 질문은 언제나 환영이야. 비록 지금은 다른 전공을 두고 있지만. 아, 그러고 보니. 렌 너도 후지 부부랑 연이 있나?”

“슈리 쌤 실력이 어디 가겠나요~ 후지모토라면… 선배님들 말씀이세요? 에이, 저한테는 너무 대선배님들이죠. 여기 막 입성했을 때 인사는 한 번 드린 적이 있는데… 딱히 연이 있진 않아요.”

“얼굴을 못 본지 좀 돼서. 뭐, 바쁠 만하지.”

“밤낮없이 일하고 연구하는 건 누구나 똑같죠. 아~ 그래도 나중에 연차도 쌓이고, 논문도 더 쓰게 되면 후지모토 선배님들이랑 공동연구는 해보고 싶네요. 참여라도요.”

“최연소 천재 과학자라면… 충분하지 않나?”

“아, 아아. 놀리지 마세요…!”

 

하지만 슈리가 후지모토 부부의 얼굴을 보게 되는 날은 오지 않았다. 렌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는 형태로 남게 되었다. 후지모토 부부는 자살했다. 하지만 동시에 세간에선 의문사라고 불렸다. 학계의 별이 지고, 수사의 막이 내리던 찰나. 경찰들은 마지막으로 지하 깊숙한 지하실의 문을 열었다. 방대한 종이로 이루어진 식물의 요람.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공기. 그 공간 한구석에는 발목에 쇠사슬이 묶인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몸에 걸친 옷가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아이가 몸을 떨 때마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이 과거, 들판에 핀 풀들처럼 흔들렸다. 왜소하고, 앙상하다. 뼈와 가죽만 겨우 남은 신체였다.

 

“아, 으… 으아, 아.”

 

사람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모습이 흡사 한 마리의 짐승과 다름이 없었다. 말은 통하지 않고, 사슬이 걸린 발등에는 흉터가 있으며, 양 팔뚝은 온갖 멍과 바늘구멍, 조직 검사의 흔적 등으로 너덜거렸다. 후지모토가 전원 사망. 아니, 후지모토가 한 명 생존. 하지만 이 사실은 은폐되었다. 다름 아닌 슈리가 아이를 거두며 내린 결정이었다. 슈리는 연구실에서 자신의 병원으로 돌아갔다. 안전을 위해 너무 넓은 1인실 대신, 자신이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에 잠든 아이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이름과 나이 그리고 성별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슈리는 아이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걱정 마 해치지 않아.

“으, 우…….”

“말은 역시 못 알아듣나.”

 

아이가 떨어질까 봐 침대는 두지 않았다. 1인실 바닥은 푹신한 어린이용 매트가 잔뜩 깔려있었고, 이불이나 인형 베개 등을 제외하면 아무런 가구를 두지도 않았다. 입원실이라기엔 바라볼 수 있는 한 면 전체가 유리였다. 치료와 관찰을 위한 목적이었지만, 아이가 예전과 같은 트라우마를 겪진 아닐까 매일을 걱정하는 슈리였다. 29번 환자차트는 슈리가 작성한 부분을 제외하면 적혀있는 정보가 전혀 없었다. 후지모토가 지하실에서 무슨 실험이 진행되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 건 산더미 같았지만 물음에 답해줄 사람도 남지 않았다. 아이의 기본 정보만 남아 있던 딱 한 장의 종이. 실험체 이름 칸 아래 공백에는 ‘유일무이’라는 단어가 적혀있었다. 아이를 이렇게 학대해 놓고, 뭐가 유일무이하다는 건지. 슈리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후지모토 유이…….”

“으… 으응?”

 

서류를 내려놓고 무의식에 작게 읊조렸다. 그런데 유리 벽 넘어 두려움에 덜덜 떨던 아이가 그 소리를 따라, 슈리 앞으로 힘겹게 기어 왔다. 생전 처음 보는 반응이었다. 분명 무서워하고 있지만 무언가를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슈리는 한 번 더, 아이를 불렀다. “후지모토.” “으응.” 아이는 앓는 건지, 대답하는 건지 구분할 수 없는 소리를 냈지만 힘겹게 몸을 일으키더니 벽에 기대앉았다. 슈리는 천천히 일어나 잠겨있는 1인실의 문을 열었다. 아이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덜덜 떨기 시작했지만 발걸음을 멈추진 않았다. 몸을 낮추고, 두 시선을 또렷하게 맞춘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유이.”

“…… 응, 응. …유이.”

 

온몸을 구겨 웅크린 채 덜덜 떨던 아이가 부름에 대답했다. 그리곤 잘게 흔들리는 양팔을 뻗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안아달라고 앙탈을 부리는 것처럼. 근육 하나 없는 몸은 벽이라는 지지대를 잃자 휘청거렸다. 슈리는 아이가 다치지 않게, 늦지 않게. 아이를 천천히 붙잡아 끌어안았다. 가느다란 두 팔이 슈리의 허리를 있는 힘껏 압박했다. 유이. 후지모토 유이. 네 이름이구나. 너는, 그런 곳에서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았구나. 안겨있는 작은 몸이 흔들리는 숨소리에 맞춰 등을 토닥였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드물어 서툰 손길이었지만 유이는 만족한 듯 보였다. 잊지 않았다. 살아 있다. 이 작은 생명체가 원한 건 그저 그런,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유이는 타고난 것인지, 살기 위함이었는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20년이나 멀어진 사회성을 따라잡긴 아직 시간이 부족했지만, 두뇌만큼은 비상했다. 두 눈에 들어온 것들, 귀로 흘러 들어오는 정보들. 종류나 양, 분야 그리고 수준 또한 가리지 않고 모두 기억했다. 한 번이라도 보거나 들은 것을 절대 잊지 않는 천재적인 능력이었다. 슈리는 일 년 동안 유이를 돌보며 이 사실을 알게 됐고. 그 이후 아주 조심스럽게 둘러서, 그곳에서의 일을 조금씩 물었다.

 

“유이. 부모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해?”

“응, 응? 엄마 아빠 얼굴. 잘… 기억 안 나. 유이 눈, 아빠가 뾰족한 거 가지고 오면 더 안 보였어!”

“…… 그래. 네 시력은 별로 좋지 않았지… 부모님이 했던 말은, 기억나는 게 있어?”

“자연, 식물 이야기? 연구, 실험, 위대한… 제물? 그곳, 단체… 사람들? 엄마 아빠 말은 너무 어려워서, 보여준 종이만 열심히 봤어. 그거 보고 있으면 엄마랑 아빠는 웃었어!”

“음… 알겠어.”

 

천재적인 두뇌여도 방어기제를 따라갈 수 없다. 슈리는 별 소득이 없어 물음만 가득하게 적은 보고서에 몇 번이고 줄을 그었다. 작게 숨을 내뱉은 슈리는 종이에서 눈을 떼고, 다시 유이를 바라봤다. 그리곤 마지막 질문을 내뱉었다.

 

“부모님이 했던 행동 중에선, 기억나는 게 있어?”

 

그 물음에 유이는 다리를 바들거리며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근육이 부족해 휘청거리고, 푹신한 매트에 잠깐 넘어지기도 했다. 슈리는 그 모습을 보며 몇 번이고 움찔거렸다. 아이가 더 다치기 전에 도와주고 싶었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로 하라고 이야기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 과한 도움은 아이의 성장을 억누르는 것과 같았다. 사용되지 못한 근육은 계속해서 움직여야 늘어나고, 부드러워진다. 중심을 잡는 연습은 스스로 넘어지지 않으면 알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슈리는 가만히 기다렸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유이는 천천히, 앉아 있는 슈리 앞에 섰다. 그리곤 품에 파고들어 그의 허리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 유이?”

“응, 응. 헤헤, 안아줬어. 따뜻하고 포근했어. 똑똑히 기억해! 딱 한 번이었지만 유이를 안아줬어.”

 

슈리는 그 이후로 더 이상 과거의 일을 묻지 않았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작은 몸을 따라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맨살이 닿고, 품에 작은 아이가 가둬지면 그 온기가 따뜻하고 포근했다. 지나간 과거를 찾는 건 이제 그만하자. 네가 살아있으면 됐어. 살아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네가 잘 크길, 이름처럼 자라나 세상을 장악하길 바라.

 

...

 

렌은 슈리를 통해서 유이를 알게 되었다. 물론 슈리의 조카라고 혼자 추정하는 바람에 21살이라는 사실은 첫 만남에 알고 말았지만. 유이는 렌을 매우 잘 따랐다. 1년간 봐온 슈리보다도 더 렌에게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살가운 성격,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투. 거절 한번 없이 받아주는 어리광과 따뜻한 품. 유이는 언제나 렌이 집에 찾아올 때면 흙밖에 남지 않은 삭막한 정원을 맨발로 뛰쳐나왔다.

 

“오빠느은~ 식물학자라고 했잖아.”

“응, 그렇지.”

“그럼, 유이 엄마랑 아빠도 잘 알아? 슈리는 엄마 아빠 얘기만 하면 아무것도 대답해 주지 않아. 막, ‘이제 잘 시간이다.’ ‘간식 먹어.’ 하면서 말을 돌려! 물론 간식은 너무너무 좋지만~”

“하하, 그랬어? 음… 그런데 오빠도 아는 게 많이 없어. 대단한 식물학자 선배님들이었고, 논문도 많이 쓰셨지. 안타까운 사고만 아니었으면 오빠도 언젠간 공동연구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렌은 따지고 보면 제2의 유이 보호자이기에 슈리에게 유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전해 들었다. 텅 비어 있는 정원, 큰 이층집. 그 아래 숨겨진 지하 3층, 식물이나 동물을 배양하는 실험체 구역. 그곳에서 ‘실험체’가 된 사람이 존재했다. 어린 여자아이, 식물학자 선배들의 딸, 후지모토가의 유일한 핏줄. 후지모토 유이. 유이는 모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사실을 회피하는 건지, 제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꺼냈다. 충격과 공포, 트라우마에 가려져 잘 기억하지도 못하는 그 시절을 항상 회상하고 그리워했다.

 

“엄마랑 아빠도 엄청 대단한 식물학자라고 들었어!”

“유이도, 식물 잘 알아! 엄마가 알려줬어. 막, 두꺼운 종이랑 책이랑 보여줘서 바닥에도 벽에도 유이 손 안 닿는 천장에도 잔~뜩 식물 이야기가 적혀있었어!”

“식물이랑 내 머리카락은 똑같은 색이니까, 나는 분명 성공할 실험체가 될 거라고 했어. 성공하면, 엄청난 거라고… 그럼, 엄마랑 아빠가 웃었어. 엄마랑 아빠가 웃으면, 나도 좋아!”

 

렌은 유이가 과거를 이야기할 때마다 마음이 저렸다. 함께 느껴지는 안쓰러움은 당연한 감정이었다. 슈리에게 들은 이야기, 사진과 서류, 데이터로 남겨진 유이의 치료 과정과 모습은 절대 인간이, 부모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 식물이 사라지고 산소가 줄어들며 자연스레 멸종하는 생물도 늘기 시작했다. 동물 실험도 연구원들 사이에선 아주 조심스럽고, 신중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을, 하물며 자기 자식을 그런 일에 이용할 수가 있나.

 

“오빠도 유이가 웃으면 좋아. 하지만~ 유이가 오빠도 좋아해 주면 좋겠는데.”

“헉… 유, 유이는 렌 오빠 엄청 엄~청 좋아해! 슈리도, 슈리도 똑같이 좋아해!”

“정말~? 너무 기쁜데. 좋아, 유이가 오빠 좋아해 주니까 기쁨의 빙글빙글~”

“꺄아, 빙글빙글!”

 

렌은 유이랑 있으면 평화롭고 마음이 편해졌다. 순수함에 슬프기보단 그 맑음을 지켜주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온실 속 화초처럼, 춥지 않고 아프지 않게 지켜주고 싶었다. 현실은 차갑고 잔인하다. 개인적인 일과 연구에는 진전이 없고, 자신이 몸 담그고 있는 단체는 겉과 속이 달랐다. 하지만 털어놓을 곳은 없었다. 이것 또한 자신 혼자의 몫이었다. 분명 그래야만 했다. 시간이 흘러 조금 더 자란 유이가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까지는.

 

...

 

“뭔가 결심한 모양이네. 그래, 여태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겠지?”

 

슈리는 눈치가 빨랐다. 하지만 구태여 묻지 않았던 이유는 렌을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이번엔 자신의 공간이 아닌, 렌의 연구실에 앉아 그를 바라봤다. 생각보다 얇은 보고서 파일을 들고 평소와 다르게 조금 단호한 얼굴을 한 렌은 슈리의 앞에 마주 앉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몰라요. 사실 저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고요. 과학적으로, 현실적으로 납득되지도 않죠.”

 

렌이 건넨 얇은 보고서 파일. 혼자 연구했기에 빈약한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무언가 있는 게 분명했다. 슈리는 별다른 대답 없이 몇 장 되지 않는 종이를 넘겨보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는 양이기에 몇 번이나 반복해서 그 내용들을 머리에 새겼다. 읽는 내내 앞서 렌이 말했던 이야기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떤 가설로도 납득되지 않고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게 정말 가능하다고?

“하하… 역시, 그렇게 생각하시죠?”

“여태 의료나 심리 분야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가 이해되긴 했어. 거기다가 뭐… 네가 농담할 성격도 아니고 말이야.”

 

슈리의 답에 렌은 긴장하고 있던 몸에 힘을 조금 풀었다. 아무리 서로의 신뢰가 깊어도, 인간의 영역이 아닌 일은 납득하기 쉽지 않을 테니까. 렌은 덧붙여 설명을 이어갔다. 슈리가 조금 더 안심할 수 있게, 그리고 유이만이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이유를 강조하기 위해서. 슈리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으면서 검지로 책상 위를 툭, 툭… 느리게 치고 있었다.

 

“강요는 아니에요…! 유이 건강이 우선이니까요. 무엇보다, 제가 소개하면서도 정말 터무니없다고 생각하긴,”

“믿어. 렌, 네 말이 거짓일 리 없지. 무엇보다 너도 진심으로 유이를 아끼고 있을 테니.”

 

‘믿어.’ 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말이 고팠나 보다. 슈리의 한 마디에 괜히 마음이 울렁거리고, 눈물이 울컥 올라왔다. 울지는 않았지만 자신 앞에 있는 남자는 아마네 렌을 너무 잘 알고 있어 못 말린다는 얼굴을 하며 작게 웃었다.

 

“나는 유이가 지금보다 더 건강을 회복했으면 좋겠어. 무엇보다 그 아이라면 네 말이면 뭐든 좋다고 하겠지.”

“…….”

“렌, 네가 모든 준비를 끝내면 얘기해줘. 나도 내 자리에서 유이를 최대한 돌보지. …정말, 돌아올 수 있는 건가. 세상이.”

“감사해요. 세상은……. 제가 장담할게요. 돌아올 수 있어요. 유일해요. 그 꿈을 꾼다는 건, 사라진 걸 지금 두 눈으로 본다는 건. 저에게도 세상에서도… 유이가 유일해요.”

“유일 하다."

 

슈리는 유이의 이름 아래 적혀있던 ‘유일무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후지모토 유이(藤本 唯). 세상에 남은 방법은 오직 그것뿐(唯)이다. 유일(唯一)하다. 이건 무거운 우연일까 가혹한 운명일까? 우리는 아무도,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다짐한다. 망가진 세상에 몸을 던지겠다고.

 

“유이의 힘이 필요해. 오빠를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

“내가 렌 오빠를 도와줄 수 있어?! 갈래, 갈래~”

 

담쟁이덩굴은 좁은 온실 속에서 자랄 수 없다. 새는 작은 새장 안에서만 지낼 수 없다. 웅장하게 장악하고, 드높게 도약하기 위해 그 오랜 시간을 버텨왔다. 진흙 사이에서 피어난 연꽃이 아이를 이끈다. 있는 힘껏, 손을 잡고 빈 대지를 달리면 둘의 손끝에서 시작된 초록비가 온 세상에 쏟아진다. 피부에 닿는 차가운 빗물이 상쾌하고 빗물이 땅을 적신다. 그러면, 그제서야 풀과 꽃들이 피어올라 삭막했던 바닥에 들판을 만든다. 담쟁이가, 네가 세상을 장악한다.

 

 

“유이 안녕~ 오랜만이지?”

“헉, 오빠아!!! 완~전 보고 싶었어!”

 

피어난다.

펼쳐진다.

날아오른다.

 

맨살에 닿는 부드러운 손길, 강한 압박감, 그립고 익숙한 얼굴. 그 따뜻하고 포근한 포옹에 젖어 담쟁이는 하염없이 기댈 수 있는 연꽃을 기다려왔다. 너를 절대 넘어뜨리지 않겠다고,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다시는 혼자 두지 않는다고. 온 힘을 다해 품으로 받아내면, 후지모토가 렌에게 기대어 피어난다. 두꺼운 과거를 깨고 나와 날개를 펼친다.

 

그렇게 앞으로, 위로. 계속 나아간다.

스스로 틔워진 싹.

네가 그려낸 기적의 이름.

 

“아하하. 오빠도 완~전 보고 싶었어~”

 

나의 녹음.

세상.

행운.

기적.

 

후지모토 유이.

식물의 이름을 가진 아이야.

 

— 어서 와. 나의 유일무이한 초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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