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변함없는 마음

변함없는 마음

 

변화

명사: 사물의 성질, 모양, 상태 따위가 바뀌어 달라짐.
 
1. 시작은 천천히, 사소하게.
 
세상의 모든 것들은 변화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것을 때로는 진화라는 이름으로, 성장했다는 의미로 쓰기도 했다. 모습과 크기가 바뀌고, 목소리가 달라지고. 힘과 능력에 변화가 생기며, 때론 학계에서 통하는 이름이 달라지기도 했다.
 
<보호자: 아마네 렌.>
[별명: 가을. 성별: 남. NO. 059 / 윈디. 특징: 왼쪽 뒷발 의족.]
[별명: 라떼. 성별: 남. NO. 745 / 루가루암. 특징: 없음.]
 
유이는 얼마 전, 진화한 라떼의 서류를 수정했다. 지금보다 어린아이들을 처음 만난 날이 엊그제 같은데, 가을이를 시작으로 코코와 라떼까지 진화한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포켓몬의 진화란 꼭 나이나 유대감을 필수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진화가 필수일 필요도 없었다. 이들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고 말이 안 통할 뿐, 생각을 가지고 있는 생명이니까. 이들의 개체 중에선 종종 스스로 진화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고, 또 반대로 진화를 거부하여 참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아이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 진화의 돌과 변함없는 돌이었다. 이런 돌들은 포켓몬을 위한 물건이기도 했지만,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해선 의사와 상담하는 것이 좋기 때문에 유이는 이런 물건들을 의약품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보호자: 후지모토 유이.>
[별명: 네티. 성별: 남 NO. 177. / 네이티. 특징: 오른쪽 날개 의수.]
[별명: 코코. 성별: 남. NO. 334 / 파비코리. 특징: 색이 다른 개체.]
 
자신의 아이들이 적힌 서류에서 멈춘 유이는 네티의 이름이 적힌 부분을 빤히 바라봤다. 진화는 필수적이지 않지만 가장 오랜 시간 함께한 파트너가, 이유도 모르는 채 진화하지 않는 건 의사로서 조금 걱정이 됐다. 혹시라도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진화를 억지로 억누르고 있다면, 체력 소모도 크고 컨디션도 좋지 않을 테니까. 물론 이 정도의 일이라면 옆에서 매일 지켜보는 입장에서 모를 수가 없긴 하겠지만…. 유이는 네티의 생각을 전부 알 수가 없으니 조금 답답한 마음이었다.
 
“네티~”
“삐.”
“어디 아픈 곳 없지?”
“삐-“
“저번 주 건강검진 결과도 엄청 건강하다고 나오긴 했어~ 그런데 네티, 살이 전보다 조금 쪘는데… 지방이나 근육은 그대로네. 우리 애 아직도 성장기인가.”
“삑.”
“이러다가, 엄마 어깨에 못 올라올 정도로 엄청 커지면 어떡하지~ 조금 서운할지도 몰라~”
 
네티는 유이의 말에 대답하듯 매번 다른 톤의 소리를 냈다.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생명체의 모습에 장난스레 웃음을 지은 유이는 제 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네이티를 꼬옥 끌어안은 채, 오늘의 센터 업무를 마무리했다.
 
2. 성장통은 멈추지 않고.
 
센터 바로 위, 집으로 올라온 유이는 거실 소파에 앉아 꾸벅, 꾸벅 졸고 있는 제 애인을 바라봤다. 가끔 슈리가 출장을 나가 주말에 혼자 집을 지키는 날이 생기면, 렌이 자연스레 주말 동안 유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물론, 유이가 먼저 집에 본인밖에 없다며 렌을 불렀고 렌은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을 뿐이지만.
 
“렌도 참… 졸리면 먼저 자라니까. 가을이, 라떼. 네티랑 코코도 잘 준비하자. 아빠는 엄마가 깨울게.”
렌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가을이와 라떼, 코코 그리고 유이 품에 안겨있던 네티까지 모두 익숙한 듯 침실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미소 지은 채 잠시 바라본 유이는 잠든 렌 입가 오른쪽 아래에 있는 점에 짧게 입을 맞췄다.
“렌, 들어가서 자자.”
“응…? 아, 몇 시야……?”
“열두 시 반 조금 넘었어. 들어가서 자고 있어도 괜찮은데.”
“아냐… 얼마 안 기다렸어. 유이랑 같이 자야지.”
 
훨씬 더 늦게까지 업무를 본 건 본인이면서도, 자신을 걱정하는 유이의 얼굴을 본 렌은 푸스스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 다가와 있는 입술에 짧게 입 맞추곤, 자리에서 일어나 번쩍 유이를 안아 든 렌은 아이들이 걸어간 길 그대로 발을 옮겼다.

평화로운 금요일 밤. 아니, 이제는 토요일 새벽이 되어버린 시간. 간간이 아이들의 코 고는 소리가 작게 들려오고, 고요함과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주위를 감싸는 때였다. 평화롭기만 한 그 속에서 문득, 잠에서 깨어난 렌은 허전한 품과 비어버린 옆자리를 보곤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다. ‘다리 밑에서 자는 라떼, 유이의 베개 위에서 옹기종기 모여 잠든 네티와 코코. 그런데… 유이랑 가을이는 어디 갔지?’ 침대에 누워있는 아이들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일어난 렌은 거실에서 들려오는 작은 노랫소리에 느릿한 걸음을 옮겼다.
 
“유이…?”
“아, 렌.”
 
해가 뜨기 전, 가장 어스름한 푸른 새벽. 거실 러그 위에 엎드려 잠들어있는 가을이와 그 곁을 지키는 유이를 보며 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의문보단 몸이 먼저 움직였기에 렌은 자연스레 유이에게 다가가 앉아, 제 작은 연인을 품에 가둬 어깨맡에 얼굴을 부비적댔다.
 
“렌 피곤할 텐데, 내가 깨웠나?”
“으응, 아냐. 둘이 왜 나와 있어?”
 
잠이 다 깨지 않은 렌의 머리카락이 유이의 어깨를 간지럽히자, 유이는 미소를 지은 채 렌을 어루만졌다. 사랑하는 제 아이가 깨지 않게 작은 목소리를 내는 유이의 말은 다정했고,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 전. 자고 있던 유이를 깨운 건 고통스러움에 앓는 소리였다. 눈을 비비며 렌의 품에서 조용히 나온 유이가 거실에서 발견한 건 큰 창문 구석 커튼 아래, 얼굴만 겨우 비집어 넣은 채 벌벌 떨고 있는 가을이였다. 유이는 가을이를 가디 시절부터 지켜본 사람 중 하나였다. 가을이와의 첫 만남은 렌과의 첫 만남이기도 했으니까. 경찰인 렌의 파트너 가을이는 사고로 인해 후천적으로 의족을 착용하게 되었는데 의족을 적응하는 과정이나 환상통, 재활 등… 고통스러운 상황이 생기면 언제나 커튼이나 침대 아래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 이제는 윈디가 되어 침대 아래에 들어갈 수 없으니 선택지가 커튼밖에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렌보다 큰 몸이 커튼 하나로 숨겨질 크기도 아니었다.
 
신체를 대신하는 기계, ‘의지’는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고 오랜 시간 적응한다고 해도 몸에서는 이물질로 받아들이기에 꾸준한 관리가 필요했다. 피부와 맞닿고, 연결된 이상 날씨나 환경을 많이 타기도 했다. 오늘같이 날이 추워지면 유이는 의수와 의족을 가진 네티와 가을이를 유독 주의 깊게 살펴봤다. 가을이는 아무렇지 않게 뛰어다니는 것 같았어도 한 번씩 뒷발을 털어내는 게 신경 쓰이긴 했는데, 결국 그 고통이 아이의 단잠을 깨웠던 모양이다.
 
“가을이, 바닥 차가우니까 이리 올라올까? 엄마한테 와.”

유이가 따뜻한 러그 위에 앉아 두 팔을 뻗자, 의수를 쩔뚝이며 다가온 가을이는 거대한 몸으로 유이 품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몸만 컸지, 여전히 애기라니까. 가을이 아빠가 걱정할까 봐 아침에는 그렇게 뛰어놀고, 밤에는 조용히 거실로 나온 거야? 아빠 속상할 거 같아서?”
 
작게 “끼잉, 낑….” 소리를 내는 가을이를 웃으며 바라본 유이는 의족 주변을 따뜻한 물수건으로 닦아주며, 시선은 여전히 가을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가 엄청 강하고, 멋진 사람인 건 가을이가 제일 많이 봐왔잖아.”
 
그 말에 느릿하게 꼬리를 흔들며 축, 귀를 내린 가을이는 마치. “파트너를 걱정시키면 안 돼. 걱정하면, 속상해.”라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사랑하기에 전부 알고 싶고, 사랑하기에 숨기고 싶은 이 어려운 마음을 어떻게 너희가 알고 있는 걸까. 유이는 가을이와 말이 통하지 않아도 아니,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이 사랑과 배려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일은 아빠한테 비밀로 해줄게. 그래도 다음부터는 엄마한테라도 꼭 말해주기야, 알겠지?”
 
가을이는 그 말을 이해했다는 듯 혀를 내어 유이의 얼굴을 한참이나 핥았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얼굴을 몇 번이나 쓰다듬고, 아파하던 다리 부분을 계속해서 마사지해 주자 가을이는 그제야 통증이 가라앉은 건지 얼굴을 천천히 내려 쏟아지는 졸음에 눈을 감았다.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 유이는 졸음이 가득한 렌 얼굴에 입을 맞추며 작게 웃음 지었다.
 
“나랑 가을이랑 둘만의 비밀인데 어쩌지~”
“응? 궁금한데… 나중에라도 꼭 알려줘.”
 
작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사실 둘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충분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렌은 누구보다 가을이를 오래 봐왔고, 가을이가 이렇게 된 이유에 가장 가슴 아파한 사람이니까. 손을 뻗어 이제는 자신의 손보다 훨씬 커져 버린 앞발을 살짝 잡은 렌은 천천히, 가을이의 발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우리에게 이런 날은 수없이 많이 찾아오겠지. 하지만 이건 특별한 일도, 슬픈 일도 아니야. 그냥 우리에게 있는 평범한 일상 중 하루일 뿐인 거야. 태양이 뜨기 전이 가장 어두운 새벽이래도 이렇게 곁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손을 놓지 않을게. 사랑하는 나의 파트너, 두려워하지 마. 우리는 언제까지나 함께니까. 잘 자, 좋은 꿈 꾸길.

 
3. 서로의 바람을 되새기며.
 
주말이 지나고 다시 돌아온 평일. 주말 내내 출장을 나갔던 슈리는 월요일 오후가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의사가 없으면 자연스레 센터는 휴일이 되다 보니, 보조 의사이자 재활 치료사인 유이도 주말에 이어 쉬는 하루가 됐다.
 
“모레까지만 쉴까, 넘겨야 할 서류도 좀 남았고. 그런데 센터 물건 중에 변함없는 돌이 하나 비던데.”
“푹 쉬는 것도 중요하지. 슈리는 너무 일만 하긴 해. 이거 봐, 또 오자마자 일 얘기하고.”
“출장은 출장이고, 일은 일이지.”
“흐음… 일단! 변함없는 돌은 안 보여서 따로 채워놨어. 정리하다 잃어버렸거나, 작아서 어디 사이에 떨어졌을지도 모르겠네. 그보다 슈리~ 오늘은 돌아온 날이니까, 그냥 푹 쉬어. 응? 저녁도 같이 먹고~”
“고생했네. …… 뭐, 그럴까.”
 
편한 옷을 입고 따뜻한 커피를 내려 식탁에 앉은 슈리는 소파에서 뜨개질하는 유이를 바라봤다. 뜨개질은 날이 선선해지면 꾸준히 돌아오는 유이의 취미였다. 어릴 때부터 시작된 취미에 슈리는 이미 모자, 장갑, 목도리, 슈리의 파트너 모양 키링 등의 선물을 받게 되었고. 그것들은 엉망진창 서툰 모양부터 이제는 완벽해진 모양까지 나열할 수 있었다.
 
“어릴 때 작은 손으로 꼼지락, 집중하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애들은 정말 빨리 크네.”
“응? 슈리 뭐라고 했어?”
“뜨개질하는 거 보니까, 겨울이 실감 나서.”
“확실히 이제는 겨울이 맞지. 슈리도 목도리 새로 떠줄까? 귀마개도 좋을 거 같아~ 크리스마스 선물로 어때? 우리 큐랑 쿠 목도리도 새거로 바꾸고. 아이쿠, 당연히 네티랑 코코도 떠주지~”
 
이름이 언급되자 몬스터볼에서 나온 슈리의 파트너들과 다른 방에서 놀던 네티와 코코까지 옹기종기 거실로 모여 유이를 둘러쌓았다. 엉망진창 털실을 두르고 있는 코코와 푹신한 실이 신기한지 이리저리 만져보고, 물어보는 큐와 쿠 그리고 유이 옆에 앉아 그것들을 열심히 정리해 보려고 하는 네티. 사소하고 평화로운 광경에 슈리는 아이들의 보호자로서, 이 모습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이전에 만들어준 것도 아직 깨끗하니까, 천천히 떠줘도 괜찮아. 무엇보다… 지금 뜨는 건 다른 거 같은데.”
“우와, 슈리 눈은 못 속인다니까~ 의지가 너무 차갑지 않게 옷처럼 감쌀 수 있는 걸 만들어보려고!”
“음…. 나쁘지 않네. 확실히…… 부품이나 재질에 한계 때문에 온도에 취약한 건 사실이고, 기능적인 측면도 있지만 아이들마다 특성이 달라서 발열, 냉각 기능을 넣기에도 까다로웠지.”
“응. 종종 맞춤 제작을 맡기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금액도 어마어마하고… 평균에 기준을 맞추자니 타협하게 되는 것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엄청난 해결 방법은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덜 차갑다면 통증이 많이 줄어들겠지. 의외로 간단한 방법인데 생각도 못 했네. ……나도 늙었나.”
 
안경을 벗고 미간을 꾹 누르는 슈리를 보며 유이는 푸하하, 소리내어 웃음을 지었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웃음, 생명을 생각하는 올곧은 마음. 슈리는 환한 웃음을 처음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저 아이를 만난 지 얼마나 됐더라.
 
12년 전 여름의 끝물, 가을의 시작. 그 시원한 공기가 머리카락을 흩날리던 날에 슈리는 한 어린아이에게 손을 건넸다. 아이가 마주 내민 손은 아주 작고 차가웠지만 반짝이는 갈색빛 눈은 대지를 닮았고, 바람에 흩날리는 녹빛 머리카락은 세상을 가득 채운 자연의 이름을 하고 있었다.
 
“네가 후지모토구나. 난 리쿠에이 슈리라고 해.”
“…….”
“음….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내가 말주변이 별로 없거든. 후지모토가 포켓몬 의학에 관심이 많고, 재능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후지모토만 괜찮다면 네가 날 도와줬으면 하는데….”
 
유이는 갓난아기일 때부터 리쿠에이 가에서 후원하는 보육원에서 자라왔다. 유이가 놓여있던 곳에는 메모가 하나 있었는데. [후지모토 유이, 다시 올게.]라는 짧은 글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기대하고, 상처받지 않게 하려고 이런 메모나, 이야기는 해주지 않는 게 원칙이었는데. 우연하게 들은 이야기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기대하게 만들고… 나중엔 배가 되어 상처로 돌아왔다. 이 일에서 그치지 않고 또 한 번의 입양 무산, 사유는….
 
“포켓몬 헌터… 부부였다고요.”
“네… 처음부터 이 사실을 밝혔다면 보육원을 둘러볼 기회가 없었을 테니 숨긴 것 같더라고요. 알았다면 보육원에 발도 못 들이게 했을 텐데.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 중에 제일 포켓몬이랑 유대를 잘 쌓고 어린 나이에도 지식이 뛰어나다는 점에서 후지모토를 선택한 것 같았어요.”
“…… 그 점이 포켓몬 밀렵에 용이하니까요.”
“그렇죠…. 포켓몬의 마음을 제일 잘 아는 아이라고 소개하면 이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데, 반대로 악용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입양 전에 우연히 알게 된 건 다행인데 후지모토가 상처받은 거 같아요. 사실대로 말해주기엔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일 거 같고….”
“알겠습니다. 견학과 입양 절차를 더 강화해야겠군요.”
 
 슈리는 그날 이후로 생각이 많아졌다. 악행은 왜 선행을 지우는 걸까. 절망이 항상 희망을 잡아먹는 이유는? 자신은 태어나자마자 자연스레 가지고 있었고, 속해 있어서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가족이란 무엇일까. 구성원과 붙여지는 이름을 따지는 건지, 조건 없는 애정을 기반으로 하는 건지…. 아니, 애초에 그 단어를 누군가가 정의할 수 있는 건가? 슈리는 신중하고, 생각이 깊었지만 이번만큼은 감정이 생각을 덮었다. 그러니까, 이성적인 판단보단, 그저 자신의 마음을 따라갔다. 누가 본다면 충동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슈리답지 않은 선택이기도 했다. 글쎄, 어쩌면 가족이라는 건 인연을 넘어선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거 같기도 하다.
 
“너무 갑작스럽지. 하지만 이번엔 후지모토,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기회라는 거야. 꼭 누군가에게 선택받지 않아도 괜찮아.”
“…….”
“앞으로의 삶 속에서 네가 갈 수 있는 길은 수없이 많이 펼쳐지겠지, 스스로 선택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야. 당장은 어른들의 말이 믿기 힘들다는 것도 알아. 그래도… 믿어줬으면 해, 네 미래는 어디까지라도 향할 수 있을 테니까.”
 
작은 아이와 시선을 맞춘 슈리, 그 둘을 향해 바람이 불었다. 이 시원한 공기는 사실 누군가의 간절한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번엔, 정말로…… 가족,이… 되어주는 거야…?”
“후지모토, ……유이. 네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진심 어린 말이 닿은 건지, 상처받았음에도 구겨지지 않은 마음이 올곧은 건지. 그 아이는 슈리가 건넨 손을 따라 작은 손을 내밀었다. 맞닿은 피부는 차가웠고 동시에 붙은 이름은 시작이었다. 끝이 있기에 다시 시작이 올 수 있는 거라고, 차갑다면 앞으로 따뜻해질 일만 남은 거라고.
 
마주 잡은 손에 환한 웃음은 지금까지, 여전히 이어졌음에도. 우리에게 시작을 되새기는 일은 행복을 곱씹는 일과 같았기에 슈리는 유이의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첫 만남을 항상 떠올렸다.

유이, 네 따뜻한 마음이 모든 생명들에게 언제까지고 이어지길. 네가 걸어갈 미래의 길을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환하게 비추길 바란다.

 
4. 마주한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기온이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아이들이 가진 여름털은 푹신하고 따뜻한 겨울털로 바뀌었다. 오늘도 열심히 그 털들을 빗질한 유이는 뭉텅이로 모아진 털들을 정리하며, 마당에서 뛰어노는 렌과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시끌벅적한 그 사이에 요즘따라 얌전해진 네티에게 다가간 유이는 동그란 머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누르기 시작했다.
 
“네티~ 요즘 빗질도 안 좋아하고, 신나게 놀지도 않고. 고민이라도 있어?”
“삐.”
“안 움직여서 살찐 거 아니야? 뽈뽈뽈 잘만 뛰어다니던 애가 요즘 왜 이런담.”
“삐.”
“어어, 엄마한테 고개 돌렸어? 엄마도 삐진다?”
 
야외 테이블 의자 위에서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린 네티를 보며 유이는 작게 웃음을 지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투정을 부리는지는 모르겠으나, 삐진 아이들을 구슬리는 방법은 간단했다. 유이가 허리춤에 찬 가방에서 달그락, 소리가 나는 무언가를 꺼내 들자 아이들은 너나 할 거 없이 본능적으로 귀를 쫑긋거리고, 고개를 돌렸다.
 
“간식 먹고 싶은 착한 포켓몬 친구~? 스낵도 있고, 포핀도 있는데!”
 
아닌 척하면서 고개를 바로 돌린 네티, 열심히 뛰다가 다가온 라떼, 햇빛 아래 낮잠을 자던 코코까지 간식이라는 소리에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유이에게 모였다. 다만, 가장 늦게 합류한 아이가 가을이었다는 점만 빼면….
 
“가을아, 조심해!”
“컹!”
“삐!”
“아, 아이쿠…!”
 
렌이 뛰어 가는 가을이를 말렸으나,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달려온 가을이는 결국 네티가 앉아 있던 의자를 넘어뜨렸다. 다행인 건 가을이도 의자에 부딪히지 않았고, 네티도 빠르게 날아올라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사건은 안심했을 때 일어나는 법. 네티가 작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오르자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바닥에 떨어졌다.
 
“가을이, 아빠가 조심하랬지~”
“둘 다 안 다쳐서 다행이다. 응? 근데, 네티 이거….”
 
가을이의 볼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기던 렌은 유이가 시선을 내린 곳에 있는 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작고, 아주 동그란 돌멩이. 자연에서 볼 수 있는 돌과는 다른 분위기를 띠는 그것은….
 
“유이, 이거 변함없는 돌 아니야?”
“응…? ……? … 네티!”
“앗…!”
 
렌이 유이에게 변함없는 돌을 건네주려는 찰나, 재빠르게 나타난 네티가 중간에서 돌을 가로채 나무 위로 날아가 버렸다. 제 것이라는 듯 복슬복슬한 털 사이에 돌을 집어넣은 네티는 아무렇지 않은 척, 눈을 굴러 유이의 시선을 피했다.
 
“네티! 변함없는 돌은 왜 가져간 거야?!”
“…….”
“말을 안 해주면 모르지! … 일단, 이리 내려와. 엄마 속상해.”
 
유이는 네티가 올라가 있는 나무를 향해 양팔을 뻗었다. 동시에 축 내려간 눈썹, 울망이는 눈은 그 누구보다 제 파트너를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연말이라 일이 바빠서 네티에게 관심을 더 가지지 못했던 거? 건강검진 결과가 멀쩡해서 안심했던 거? 유이는 스스로가 가진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타고나길 남들보다 포켓몬이 잘 따르고, 그들의 마음을 알기 쉬웠다. 쉽게 마음을 열고 다가오는 아이들, 순수하고 맑은 마음은 언제나 고맙고 응해줄 수밖에 없는 형태지만 유대가 쉽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네티, 얼른… 응? 안 혼낼게.”
“삐…….”
 
그럼에도 진심은, 마음은 언제나 통하는 법이다. 작게 소리를 낸 네티는 다시 날개를 흔들어 유이 품에 쏙 안겼다. 작은 몸을 두 팔로 감싸 안으면 안절부절못하는 네티의 얼굴이 보였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사랑스러운 나의 파트너.
 
“괜찮아, 괜찮아. 목소리 높여서 미안해.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삐….”
“네티…. 엄마한테 말하기 힘들면, 아빠가 들어줄 수도 있어.”
 
렌은 네티를 보며 작게 미소를 짓는 동시에 손으로 유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전부 알려주고 싶으면서도 숨기고 싶은 그 모순적인 마음을 알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를 너무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거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그러니까 더더욱 내가 알 수 없는 너희를 알려줘, 무엇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곁에 있어 줄게. 함께하자.
 
잠깐의 정적 이후 네티는 결심했다는 듯, 두 날개를 흔들며 삐, 삑- 소리를 내어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했다. 한참 전부터 진화를 억지로 참고, 그 고통을 참기 힘들어 센터에 있는 변함없는 돌을 몰래 챙겨 간직했다고. 그 말에 유이는 “진화하는 게 왜 싫은지 알려줄 수 있어?”라고 물었고, 돌아오는 네티의 대답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네이티로 있을래, 네이티오가 돼서 커지는 건 싫어. 어깨에 있고 싶어 엄마가 서운한 건 싫어.” 그 말에 유이는 벙찐 얼굴을 한 채 자신이 몇 번이고 했던 말들이 떠올렸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서로를 너무 배려한 나머지 오해하고 있었구나.
 
“네티, 오해야. 엄마 말은 그런 게 아니야. 엄마 말 들어줄래?”
“삐.”
“엄마는 그저, 네티가 아프지 않고 잘 자랐으면 하는 마음에 했던 얘기야. 서운하다는 것도 당연히 진심이 아니지. 어깨에 올라오지 않아도 괜찮아. 이렇게 엄마가 네티를 품에 안아줄 수도 있고, 네티가 네이티오가 되면 반대로 엄마를 안아줄 수도 있잖아?”
“삐이….”
“꼭 진화하란 소리도 아니야…. 그냥 엄마는…… 네티가 힘들게 진화를 참았던 게 속상하고 걱정돼. 네티, 원하면 네이티로 있어도 괜찮아. 엄마가 잘 돌봐줄게. 하지만 기억해 주면 좋겠어, 네티가 네이티든 네이티오든, 설령 정체를 숨기고 지내던 메타몽이든…. 네티는 그냥 네티야. 네가 무슨 모습이든 상관없어 너는 언제나 내 파트너고, 우리의 가족이야.”
 
유이는 네티의 솜털 안에 들어있는 변함없는 돌이 빠지지 않게 다시금 몸에 올려주며 환하게 웃음을 보였다. 말했잖아, 언제든 너를 끌어안고 손을 놓지 않을게. 사랑하는 나의 파트너, 두려워하지 마. 겉모습이 변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그대로니까.
 
5. 그렇게 시작되는 거야.
 
“슈리~ 큐, 쿠, 가을이~ 너무 늦게 들어오면 안 돼!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저녁에 파티할 거야!”
“가을이~ 리쿠쌤 말 잘 듣고,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고… 혼자 어디 뛰어가지 말고 알겠지?”
“컹!”
“평소처럼 산책 다녀오는 거니까, 늦지는 않을 거야. 필요한 거 있으면 보내놔 사 올게. 다른 애들은?”
“코코는 몬스터볼에서 쉬고 있고, 라떼랑 네티는 거실에서 놀고 있어. 산책 재미있게 다녀와~”
“제가 잘 보고 있을게요. 다녀오세요.”
“그래, 다녀올게.”
 
신나는 걸음으로 뛰어나간 쿠와 가을이 그리고 서로를 닮은 느릿한 발걸음을 옮기는 슈리와 큐를 바라보며 둘은 손을 흔들었다.
 
“파티 준비 도와줄까?”
“응? 이미 다 해놨는데~”
“헉, 벌써?”
“응! 렌이랑 집에서 데이트할래~”
 
양팔을 벌린 채 와락, 안겨 오는 유이의 몸을 가뿐하게 안아 올린 렌은 마주한 얼굴을 따라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연말엔 바쁜 일이 많다 보니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는 날은 간만에 휴식이기도 했고, 크리스마스라는 기념일은 별일이 있지 않아도 모두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기 충분했다. 품에 사랑스러운 제 애인을 안은 채 거실로 들어온 렌은 자연스레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무릎 위에 유이를 앉혀두고 품에 얼굴을 기대, 여태 못한 밀린 이야기들을 나누며 평화로운 시간에 미소를 지었다.
 
“렌, 라떼 잔다. 귀여워~ 지금 푹 자고 일어나면 저녁에 엄청 활기차겠어.”
“그러네. 네티랑 재미있게 놀았나 봐. 네티는 안 졸려?”
“삐~”
 
라떼 곁을 몇 번 빙글빙글 돌던 네티는 가볍게 날아올라 렌의 어깨로 자리를 옮겼다. 장난스레 렌의 볼을 콕콕 찌르고, 긴 머리카락을 부리로 물고 있는 네티를 보며 유이는 양손을 맞대 짝! 소리 나게 손뼉을 쳤다.
 
“아, 맞다!”
“응?”
“삐?”
“네티~ 엄마가 크리스마스 선물 준비했는데, 네티 먼저 줘도 괜찮을까~?”
“삐~”
“아, 그러게. 네티는 미리 받는 게 편하겠다.”
 
렌이 왼팔을 올려 유이를 마주 볼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주자, 네티는 종종걸음으로 렌의 팔을 따라 걸었다. 작은 상자에 준비해 뒀던 무언가를 꺼낸 유이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작은 파트너를 보며 웃는 채, 네티가 품에 가지고 있는 변함없는 돌을 가져갔다.
 
“삐….”
“짜잔~ 이거 봐 네티.”
 
뜨개질로 만든 작은 가방에 넣은 변함없는 돌을 보여주며 유이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리 작고 가볍다고 해도, 그냥 지니고 다니는 건 불편할 테니까. 네티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일상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에 만들게 된 네티를 위한 선물이었다.
 
“매일 돌이 품에서 떨어질까 봐 잘 뛰어놀지도 못하고, 신경 쓰는 거 같길래 준비해 봤어. 어때? 마음에 들어?”
“아빠도 아이디어는 참여했는데, 지분에 포함시켜주나?”
“삐이~!”
 
네티는 한참이나 변함없는 돌을 바라보다가, 다시 렌과 유이를 바라보다가, 이내는 기쁘다는 듯 큰 소리로 대답하며 작은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유이가 그 가방을 몸에 둘러주자 네티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변함없는 돌이 담긴 가방을 바라봤다. 마치 일 년 내내 울지도 않고, 착한 일만 한 아이가 산타에게 받은 선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반짝이는 시선은 가방을 향했고, 다시 돌아와 우리에게 맞추는 시선은 그 무엇보다 환한 미소였다.
 
“렌. 네티가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지?”
“응, 당연하지. 그것도 엄청나게 말이야.”
 
포켓몬에게 지니게 하면 지닌 동안에는 진화하지 않게 되는 이상한 돌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 변함없는 돌. 사람들은 단순히 포켓몬이 변화를, 진화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변함없는 돌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변함이 없다는 건 네 모습만을 말하는 게 아니야. 널 사랑하는 나의 마음도 언제까지나 변함이 없어. 그 무엇도 따지지 않고 오롯한 마음으로 널 사랑해. 그리고 이런 내 마음도 결코 변하지 않을 거야.
 
사랑하는 나의 파트너에게, 앞으로도 함께 행복하길 바라는 변함없는 마음을 전하며.
메리크리스마스.
 

◓글쓴이 — 됴
◓ 도움, 함께 한 사람 — 첨지
◓ 원작, 인용 등 — 포켓몬스터,
포켓몬스터 블랙·화이트 - 흔들리지 않는 마음,
BUMP OF CHICKEN - Acacia 「GOTCHA!」,
ピノキオピー - ポケットのモンスター feat. 初音ミク 

 

'아이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 유일무이한 초여름  (0) 2026.05.02
[아이] With you  (0) 2026.03.27
조각피자  (0) 2026.02.24
[아이] 스물아홉 번째 푸른 여름  (0) 2026.01.02
[아이] 사랑의 형태  (0) 2025.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