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스물아홉 번째 푸른 여름

해당 글은 됴로님의 COC 시나리오 BLUE 29를 기반으로 쓰인 페어 글로 직•간접적인 시나리오 스포가 존재합니다.
“생각해 보니, 후지상 소식을 못 들은 지 좀 됐네요.”
“너도 그쪽이랑 인연이 있던가.”
“히로시 씨만 알고 있어요. 좀 특이하긴 하죠? 식물학자가 외과 의료랑 의지에 관심을 가지는 건.”
“바쁜가 보지. 후지모토 부부는 몇 년 전, 식물이 없어진 이후로 더 바빠졌으니 말이야. 외과랑 의지는 글쎄… 사람이 한 분야에만 속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역시 그렇겠죠? 리쿠에이 씨랑 더 자주 소통하기도 했으니까요. 혹시 소식 들리면 알려주세요.”
슈리는 평화로운 시간 속에 서류를 넘기며 고개를 끄덕이며, 몇 주 전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원래도 잦은 교류를 하던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저 단순하게 생각하고 넘겼었다. 사람이란 원래 그렇지 않은가, 가까운 이와의 교류도 사서 챙기는 성격이 아니었던 슈리였기에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 슈리가 처음 보는 한 아이의 서류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며칠 전 후지모토 히로시의 전화를 받아서일까 아니면 뛰어난 의사였기 때문일까. 슈리는 그날 걸려 온 전화의 내용을 떠올렸다. “오래전에 생긴 자상의 흉터를 깨끗하게 지울 수 있나?”라는 터무니없고 단순한 질문이었다. 흉터의 형태, 종류. 시간이 얼마나 흘렀고 크기가 어떤지에 따라 다른 이 문제에 대해 슈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모든 흉터는 처음과같이 완벽하고, 깨끗하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섣불리 건드렸다간 더 큰 흉터가 남게 되겠죠.”
“안 돼… 그러면 안 되지. 깨끗한, 깨끗한 몸의 제물이 필요한데….”
후지모토 히로시, 남, 50세. 실종 신고 9일 후 집에서 70km 떨어진 장소에서 의문사. 과거 숲이 무성했던 장소에서 사망.
후지모토 유코, 여, 46세. 집 지하실 문 앞에서 자살. 사인 뇌출혈 및 과출혈. 지하실 문손잡이에 목을 매달고 있던 사항과 다르게 과출혈이 어디서부터 일어났는지 알 수 없어 수사의 난항을 겪는 중. 소지하고 있던 노트가 하나 있으나, 피에 젖어 식별의 어려움을 겪고 있음.
…….
그 전화를 마지막으로 식물학자 후지모토 일가 두 명은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후지모토 일가는 두 명이 전부인 줄 알았다. 후지모토 유코가 사망했던 그 지하실 방구석에 사람이 있는 걸 발견하기 전까지.
후지모토 유이, 여, 20세. 소통할 수 없으며, 사회화가 전혀 되어있지 않음. 발견 당시 오른쪽 발목에 구속구가 걸려 있었으며 각종 혈관으로 투석된 약물의 흔적이 보임. 허나, ‘후지모토 유이’에 관한 모든 실험 기록 말소. 겁이 많아 치료와 회복에 난항을 겪고 있음.
슈리는 길지 않은 서류를 모두 읽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를 제대로 치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우연이었을지도 인연이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우리들도 알 수 없는 무언가의 힘으로 모두가 사건의 중심으로 이끌렸을지도…….
하루, 이틀. 한 달에서 반년, 일 년…. 시간은 착실하게 각자의 속도를 맞춰 흐르고 있었다. 후지모토 유이. 이 아이는 사람이라기엔 정말 소통이 되지 않는 작은 짐승과 비슷했다. 겁이 많고 작은 게 따지고 보면 토끼와 비슷하려나.
유이는 일 년 동안 리쿠에이가에서 운영하는 슈리의 병원, 1인실에서 슈리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천천히 걷고, 무언가를 쥐고. 여러 사람을 마주하고 말과 글을 배우며 사회에 점차 녹아들게 만들며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을 회복하는 시간에 가까웠다. 어째서인지 겁이 많은 건 여전했지만, 그래도 유이는 꽤나 슈리를 따르고 믿는 것처럼 행동했다.
일 년 하고도 2개월째 되던 날. 슈리는 안정제를 투여한 유이를 제 자택으로 옮겼다. 앞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병원은 너무나도 좁은 사회였고, 유이가 보거나 경험할 수 있는 게 많이 없었으니까. 물론, 언제나 계획은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지만.
“네가 올해 스물넷이던가.”
“그렇죠? 무슨 일이길래 갑자기 나이를 물어보세요?”
방금까지 잔뜩 훑어보던 자료를 책장에 꽂은 렌은 슈리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 안경을 제대로 고쳐 쓰곤, 무언가 고민이 있는 것처럼 한숨을 쉰 슈리는 렌이 사 온 마지막 한 모금의 커피를 마시며 말을 이었다.
“요즘 애들은… 뭘 좋아하지?”
“네? 요즘 애들은 자극적인 거 좋아하죠? 먹는 거나, 볼거리나~”
“흠… 그런 거 말고, 좀 티니핑 같은….”
“네?? 리쿠 쌤 조카 있으셨어요? 생기신 건가?”
“……. 비슷해.”
“네??? 사진 보여주시면 안 돼요?”
“그건 곤란하네.”
“안 되는 것도 아니고 곤란한 건 뭐예요~”
슈리의 대답에 렌은 소리 내어 웃음을 지었다. 렌이 본 리쿠에이는 요즘 애들이랑 거리가 멀어 보였다. 조카가 있다거나 생겼다는 소식은 오늘 처음 들었고, 무엇보다 조카랑 비슷한데 사진을 보여주는 건 곤란하다니. 근무하시는 병원에서 친해진 아이라도 있으신 건가.
“치료 때문에 자극적인 건 안 되고. 하… 살이 좀 붙어야 하는데. 아직 가르칠 것도 산더미고. 하루이틀도 아닌데, 갈 길이 멀다.”
“애들은 금방 배우죠~ 아, 요즘 애들은 라부부 좋아하던데. 제가 하나 선물해도 괜찮아요?”
“……. 좀 복잡해. 그건 그렇고, 뭔지 몰라서 안 좋아할 거 같은데?”
“에이, 요즘 애들이면 다 알아요! 진짜 좋아할걸요~ 조카가 아니라 리쿠 쌤이 모르는 거 아니에요?”
“………….”
“…… 진짜로요?”
“……시간 있으면 주말에 한번 놀러 오고.”
“하하, 저야 주말에 한가하죠~ 리쿠 쌤 시간 괜찮으실 때 불러주세요.”
“그래, 메시지 남기지.”
“탕후루 같은 거 사갈까요? 예전 같은 간식은 아니겠지만요.”
“탕… 뭐? 먹을 거라면… 죽이나 빵처럼 너무 자극적이지 않고, 부드러운 거가 좋을 텐데.”
“많이 어린가 봐요~”
새로운 커피를 타온 슈리는 렌의 질문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딱히 숨기거나 비밀인 것도 아니고. 그저 침묵은 슈리의 대화 수단 중 하나였다.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렌은 실없이 웃으며 캘린더 어플을 열었다. ‘초등학생은 아닌 거 같고. 다섯 살? 여섯 살? 이쯤 됐으려나. 라부부는 무슨 색이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
“실례하겠습니다~”
“빈손으로 와도 괜찮다니까.”
“에이, 별거 아니에요.”
렌은 내심 현관문이 열릴 때부터 기대하고 있었다. 작고 귀여운 아이가 달려 나오진 않을지, 슈리 옆에 꼭 붙어 있진 않을지,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진 않을지 하는 기대들이었다. 슈리의 집은 생각보다 더 슈리를 닮아 조용했고, 삭막했으며, 슈리의 조카(추정)가 있다고 전혀 생각되지 않는 집이었다.
“애기는 자고 있어요?”
“……. 깨어 있지.”
“엇, 어디예요? 인사하고 싶은데! 저 진짜 이것도 사 왔어요.”
렌은 바리바리 들고 온 쇼핑백에서 전에 말한 인형 하나를 꺼내며 방긋 웃었다. 오묘한 민트빛 초록색이 감도는 인형의 털은 렌의 눈 색을 닮았고, 이제는 사라져 볼 수 없는 식물을 떠올리기도 했다.
“요즘 초록색이 엄청 유행이래요. 한정판 취급이라서 인기도 제일 많았다구요. 리쿠 쌤 조카가 무슨 색 좋아하는지 물어보고 사 올걸 그랬나.”
“조카, ……. 뭐, 녹색이면 아마 좋아하겠지. 방에 있으니까 소개해 줄게. 손은 씻었으니까 우선 일러주자면, 방에 들어가면 큰소리 내지 말고, 위에서 아래로 다가가지 마라. 애가 겁이 많아서 먼저 접촉하려고 하면 안 돼.”
“네……?”
“…….”
“…….”
“보면 알아.”
잠깐의 정적을 뒤로하고 슈리는 발을 옮겼다. 슈리의 침실 안쪽에는 작은 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문까지 다가간 슈리는 렌에게 한 번 더 큰 소리를 내지 말라고 경고하더니. 이내 천천히 문을 열었다.
“유이.”
“응, 으응…?”
그 문이 열리고 보인 것은 다섯 살 아이가 있을법한 아기자기한 방과 슈리 쌤의 조카(추정)였다. 물론… 그 아이가 이렇게 다 큰 성인 여자아이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혼자 놀다가 잠들었던 건지, 침대는 그냥 둔 채 러그가 깔린 바닥에 엎드려 누운 채 자던 아이는 비몽사몽, 눈을 비비며 자리에 앉았다.
“조용하더니. 자고 있었어?”
“우응.”
슈리는 물음에 대한 답인지 잠투정인지 모를 소리를 들으며 아주 천천히, 아이에게로 다가가 시선을 맞춰 자리에 앉았다. 슈리 품에 폭, 안긴 아이는 조금 생긴 틈 사이로 렌을 빤히 바라봤고 슈리도 따라 시선을 옮긴 채 렌에게 손짓했다.
“렌, 들어와.”
“아, 네.”
“응?”
세상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식물의 녹빛을 담은 긴 머리, 그런 것들을 지탱하는 가지나 줄기 따위를 닮은 진한 갈색의 눈빛. 그 반짝이는 시선이 렌의 움직임을 따라 천천히 굴러갔고,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땐 슈리의 품으로 감춰졌다. 소동물이 맹수 앞에서 겁을 먹은 것처럼, 어린아이가 낯선 얼굴을 경계하는 것처럼.
“…….”
“안녕하세요~”
“유이, 오빠한테 인사해야지.”
렌은 이 상황과 모습에 의문을 가질법도 했지만 일단 슈리와 같이 시야를 낮춰 자리에 앉았다. 천성이 의심보단 믿음이 먼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의문보단 당장 눈앞에 아이에게 호기심이 생겼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슈리 품에 얼굴을 파묻은 아이가 먼저 얼굴을 비치기까지, 렌은 원래도 작았지만, 더 차분해진 슈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후지모토 유이’ 그 익숙한 성을 듣자마자 더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같은 직종, 이름을 널리 알린 학계 부부, 식물이 사라진 이후 더욱 바쁘다는 모종의 이유로 돌연 학계에선 모습을 감추다시피 한… 2년 전에 돌연 사망 소식을 들었던, 어쩌면 대선배라고 부를만한 사람들의 성을 가진 아이.
후지모토가의 사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아이를 거두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은 렌은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중에는 의문이나 공포 같은 감정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쏟아지는 감정은 그저…. 이 작은 아이가 너무 안쓰러웠다. 대체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이를 지하실에 가두고, 최소한의 인권도 사회성도 보장되지 않은 채, 실험체로 삼아 날마다 학대하고 책임이라곤 하나 없이… 잘못에 대한 처벌 하나 없이…… 자살인지 의문사인지 구분할 수 없는 일로 끝을 마무리하다니.
“유이, 이제 인사할 생각이 들었어?”
“……. 출생 신고도 안 하고, … 그런데, 이름이 있네요.”
유이는 다시금 슬쩍, 슈리의 품에서 살짝 떨어져 렌을 올려보고 있었다. 렌은 그 얼굴을 마주한 채 유이가 듣고 있는 한해서 놀라지 않게.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이 질문은 슈리가 처음 가졌던 의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름 있는 두 학자가 지하실에서 생체 실험을 하던 실험체. 친자식이니 출생신고를 안 한다면 법에 걸리거나 접촉되는 한이 없을 테고, 집 지하실에 가둬 놓은 실험체이니 굳이 사람의 이름을. 그것도 자신들의 성인 후지모토를 물려줄 필요가 있었을까? 물론 이 의문에 대한 속 시원한 답이나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물음에 답해줄 사람도 없었고, 기록은 모두 말소되었으니.
후지모토 가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유이 발에 자상이 생긴 이유는? 자상을 지워야 하는, 깨끗한 몸의 제물이라는 이상하고 소름 끼치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필요한 이유는……? 생각을 지속할수록 이해되는 부분은 단 하나도 없었다. 렌이 이러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작은 손가락이 툭... 렌의 무릎을 두드렸다. 잔뜩 경계하면서도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 타인과 소통해 보지 못해 어색한 행동들. 그 말갛게 뜬 눈과 시선이 닿으면 렌은 순하게 눈썹을 내려 웃음을 지었다.
“유이라고 하는군요.”
“…… 슈리처럼, 선생님이… 아니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몇 살 차이도 안 나는데, 오빠가 낫지 않나?”
“하하, 부르기 편하다면 뭐든 상관없죠.”
“…… 오,빠… 안녕…! 오빠는…… 이름이 뭐야…?”
“아마네 렌이라고 해요~ 식물학자를 하고 있어요. 반가워요.”
더듬더듬 불러보는 새로운 호칭, 때 묻지 않은 채 방긋 웃는 얼굴. 그 미소는 이 아이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잠시 망각할 정도로 너무도 해맑은 낯이었다. 몸을 반쯤 엎드리다시피 슈리에게 안겨있던 유이는 몸을 돌려, 앉아 있는 렌의 다리 위로 올라오더니 이내 그대로 렌의 허리를 안아 품에 폭 안겼다. 렌이 잠시 당황해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가만히 굳어있자 슈리는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 유이를 바라봤다.
“요즘 애들은 낯도 가리나….”
“낯…을 가리긴 하겠죠…?”
“……. 간식이라도 가져올까.”
“아, 저 카스테라 사 왔는데. 제가…!”
“렌, 네가 마음에 든 거 같네. 나랑은 말 한마디 섞는데 1년은 넘게 걸렸거든. 잘 보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방에서 나가는 슈리의 얼굴은 희미한 웃음을 보인 것 같았다. 렌의 시야 아래, 반짝반짝 시선을 맞추는 유이는 잠시간 말없이 렌을 바라봤다. 작은 손을 꼬물거려 렌의 옷자락을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짐승이 무리를 구분하는 것처럼 킁킁 소리를 내어 냄새를 맡기도 했다가, 결국엔 다시 양손을 뻗어 렌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여전히 시선이 렌의 얼굴을 향했다.
“레, 레엔… 렌… 오빠?”
“네에. 아마네 렌이에요.”
“아,마네 렌. 으응… 오빠는 왜애, 슈리처럼 말 안 해?”
“네?”
“어, 어… 으음, 음…….”
렌이 유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의문을 남기자 유이는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며 나름의 고민을 하고 있었다. 아직 사회화도 어휘력도 많이 부족해 보이는 유이는 아마도 설명하지 못하는 상황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렌이 지금 이 문제를 기다려줘야 하는 건지, 어떻게든 도와줘야 하는 건지 고민하던 찰나. 유이는 다시금 렌의 시선을 끌어 입을 열었다.
“오빠는, 유이라고 하는군요. 했는데 슈리는 네가 유이구나. 라고 했어. 나아, 나. 슈리 말이 더 좋아.”
“혹시… 말을 놓는 게 편하다는 건가? 유이, 오빠가 이렇게 말하면 괜찮을까?”
“응, 응! 엄마도 아빠도 슈리처럼, 말, 했어. 오빠처럼… 식물, 잘 알아!”
“정말~?”
렌은 웃으며 대답했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유이가 부모를 기억하고, 그들이 식물학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못 했기 때문일까? 유이는 나이에 비해 많이 뒤떨어진 상황은 맞았으나, 생각보다 더 똑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게 아니어도 백지는 채울 공간이 많은 것처럼, 배울 게 많아서 습득이 빠른 시기일지도 모르지.
“아, 유이 인형 좋아해? 이거 봐봐, 유이가 좋아하는 색일지 모르겠지만…”
“응? 와, 우와…! 말랑말랑, 부드러워…!”
“어때? 마음에 들어? 유이 닮은 토끼야~ 몰랐는데, 유이도 머리색이 녹색이구나.”
이래서 리쿠 쌤이 좋아할 거라고 했던 건가. 유이는 작은 두 손을 꼼질꼼질 움직였다. 처음 느껴보는 촉각인 것처럼, 인형을 계속해서 더듬고 쓰다듬었다. 유이의 긴 머리카락은 두 갈래로 굵게 땋아 등과 허리를 따라 길게 늘어져 있었는데, 유이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보고 있자니 왜인지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식물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후지모토(藤本)는 덩굴성 식물을 뜻하기도 했지. 등나무라든가 능소화라든가, 담쟁이덩굴이라든가….
“이짜나, 있잖아아-“
“응, 유이.”
“초록색, 좋아! 엄마랑 아빠가, 식물이랑 자연이랑 내 머리카락은 똑같아서, 반드시 성공할 실험체가 될, 거라고 했어. 엄마랑 아빠가, 웃으면 나도 좋아!”
혈연이란 뭘까,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건? 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이토록 지키고 있는 강력한 동기는? 렌은 눈시울이 붉어졌으나 필사적으로 웃음을 지었다. 해맑게 웃음을 짓는 아이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도 없었고, 유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서 안쓰럽게만 바라보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렇네. 유이 머리카락은 자연을 닮았구나.”
“의사인 나보다 너랑 라포 형성이 더 잘되는 거 같네.”
“에이, 리쿠 쌤이 잘 돌봐주신 결과겠죠.”
“슈리이, 이거 봐!”
“유이. 오빠한테 인사는 했어?”
“헉……. 레, 렌 오빠, 고마워…!”
“좋아해 줘서 오빠가 더 고마워. 유이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야.”
슈리가 들고 온 달콤한 냄새에 몸을 일으켜 앉은 유이는 슈리의 말에 방긋 웃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렌은 그 미소를 눈에 담으며 동그란 머리를 아주 천천히 쓰다듬었다. 간식을 먹고, 동화를 읽어주기도 하고, 슈리와 밀린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유이는 대부분 슈리와 렌 곁에 얌전히 있거나, 혼자 이리저리 방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몇몇 특정 단어에 눈을 빛내기도 했지만 슈리는 되도록 유이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하는 듯 일상적인 주제로 대화를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식에 배가 불렀던 탓인지, 유이는 렌의 품에 엎어져 안긴 그대로 잠들었다. 유이의 등을 토닥이는 렌을 보며 슈리는 “애 버릇 나빠진다.”라며 실없는 꾸중을 건넸지만, 도저히 어두운 밤에 혼자 자지도 못한다는 아이가 너무 안쓰러워 내칠 수가 없던 렌이었다. “방금 막 잠들었어요. 힘든 일도 아닌데요~”
…
“오빠아~”
“유이! 헉, 뛰면 위험해…!”
“으응~ 보고 싶었어!”
“아이쿠.”
대문을 열자마자 맨발 그대로, 삭막한 정원에 뛰어나오는 유이를 품으로 가볍게 받아낸 렌은 소리 내어 웃음을 흘렸다. 유이를 처음 만난 그날 이후로도 렌은 꾸준히 슈리의 집을 찾아오고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유이가 렌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고, 두 번째 이유는 유이가 타인과의 소통을 더 했으면 좋겠다는 슈리의 권유 때문이었다. 치료를 위한 소통이 주가 된다면 당연히 슈리가 잘 알고 있으며, 유이가 경계하지 않고, 믿을만한 사람이면 더더욱 좋으니까.
일년 넘게 이어진 슈리의 케어, 빠른 라포가 형성된 렌과의 교류. 이 두 사람의 노력 덕분에 유이는 렌을 만난 6개월 사이에 눈에 띄게 성장하고, 발전했다. 두려움이나 낯가림은 대부분 호기심으로 바뀌었고 걷거나 쥐는 등의 소근육이 정상 범위로 들어왔다. 말을 더듬지 않고, 어휘력도 나날이 늘어가는 모습에 슈리는 “머리가 좋은 거 보니까 피는 못 속이네.”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유이. 잘 있었어?”
“응! 나 약도 한 번도 안 빼놓고 다 먹었고, 숙제도 다 해놨어! 이번 주 정기 검진도 안 울었어~”
“헉, 진짜~? 엄청나게 잘했는데?”
“빙글빙글~ 칭찬해 줘!”
“당연하지, 엄청 잘했네 우리 유이~”
혹시 맨발에 상처라도 생길까, 하는 마음에 제 신발 위로 유이를 올려놨던 렌은 “칭찬해 줘!”라는 말에 가벼운 몸을 번쩍 들어 올려 자리에서 두세 번 빙글 몸을 돌렸다. 어린아이들이 으레 좋아하는 행동들. 머리를 쓰다듬거나 품에 안아주거나 이렇게 함께 돌아주거나 하는 행위는 조건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이는 항상 칭찬이라는 명목하에 보상받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었다.
“실험체라는 도구로 사용된 기억이 뿌리부터 박혀있으니, 당연하게 쓸모를 증명하고 싶은 거겠지.”
“알아듣지도, 말할 줄도 모르던 애가 무슨 이야기를 듣고 지냈으면 그런 생각을 무의식에 하는 건지…. 너무 슬퍼요.”
“아직은 시간이 필요하겠지. 더 배우기도 해야 할 테고. 애정에 형태는 여러 가지니 그걸 어떤 식으로 표출하고, 받아들이냐는 상대와 관계에 있어 떼어놓을 수 없는 주제야. 난 그걸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모라는 이름 아래 네가 받았던 건 애정이나 사랑 따위의 형태가 아니었다고. 정확하게 일러주는 날이 언젠간 필요하겠지.”
“그렇죠… 리쿠 쌤 이제 아동 심리 전문가 다 되셨네요. 이러다 전공 바꾸시는 거 아니에요?”
“아서라… 의지랑 외과 일만 합쳐도 할 일이 산더미야. 안 바쁘면 저녁 먹고 가.”
“와, 저야 감사하죠. 유이 불러올게요.”
“유이~ 뭐해? 저녁 먹자.”
“오빠! 일기 쓰고 있었어~”
“오늘 일기를 벌써 쓰는 거야?”
“이건 꿈 일기야, 그림일기!”
유이는 크레파스로 종이를 칠하고 있었다. 렌이 다가가, 그 종이를 들여다봤을 땐. 무수하고 무성한 그리고 압도적인 식물, 자연, 정글… 그렇게 불릴만한 형상이 있었다. 분명 그린 게 맞으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사실적이어서 사진과 같은 그림. 몇 달 전까진 말도 제대로 못 하고 펜도 잡지 못하는 아이가 그렸다기엔 현실성이 없는… 기묘한 그림.
“유이가… 그린 거야?”
“응! 봤는데 좋아서~ 그리고 싶었어. 사진 찍을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응…? 어디서 봤는데?”
“꿈속에서! 오빠, 나 매일매일 식물이 무성한 곳에 가는 꿈을 꿔.”
유이가 갇혀있던 지하실은 꽤나 넓었다고 한다. 그곳의 특징적인 부분은 벽에 식물의 사진이나 서적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는 점으로, 마치 벽지 대신 책 페이지를 도배한 것 같았다고 한다. 유이가 자연물을 봤다면 당연히 그곳에서의 기억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꿈을 꾼다니….
사진보다 더 사실적이고, 생생한 그림을 바라봤다. 기묘하지만 눈앞에 숲이, 정글이 펼쳐진 것처럼 생생한 기분이 들었다. 계속해서 들여다보고 있으면 왜인지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이 도심이 아닌, 이제는 사라져 경험할 수 없는 거대하고 웅장한 자연 한가운데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오빠?”
“아, 응.”
“여기엔 호수가 하나 있는데~ 다가가면 아무것도 비치지 않고, 어느 순간 갑자기 막- 불어나서 결국엔 집어삼켜져 버려. 물이 닿으면, 식물들이 재처럼 시들어버려.”
“그럼, 유이는?”
“물이 머리까지 차면, 꿈에서 깨!”
“정말? 신기한 꿈이네.”
이 이야기의 출발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덩굴 식물은 그 자체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다. 반드시 다른 무언가에 의지하여 피어나야 한다. 하지만 그 줄기는 압도적으로 질기고, 튼튼해서, 피어나기만 한다면 누군가의 세계를 장악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의 근본이기에.
식물이 사라진 세계에서 태어난 식물학자의 하나뿐인 아이. 식물의 색을 가지고, 자연의 이름을 받은 아이. 사라진 것들을 무한하게 꿈꾸며 끊임없이 갈구하고, 계속해서 끌어내며, 종국에 우리에게… 인류에게, 새로운 시대를 선물할 유일무이한 존재.
안녕, 나의 스물아홉 번째 푸른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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